2014년 3월 4일 화요일

룩셈부르크 : 1차 세계대전 시기


1867 년, 런던회의에서 열강들의 보장하에 영세중립국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제사회에서 중립국으로서의 룩셈부르크의 위치는 불안정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각 유럽의 위기상황 마다 룩셈부르크의 문제는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고,  이웃국가들의 숨겨진 합병 욕망을 고조시켰습니다. 1914 년, 룩셈부르크는 세계 1차대전에 휘말렸습니다. 1914년 8월 2일, 독일의 군대는 대공국을 침략하여, 중립국을 침략할 수 없다는 조약을 위반했습니다. 룩셈부르크 당국은 독일의 침공에 항의하였으나, 독일군대는 침공 후, 룩셈부르크에 주둔하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국가의 기관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습니다. 나라의 주권과 주 정부는 자리에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전쟁 이 후, 연합군은 룩셈부르크의 중립정책을 비판하였습니다.

전쟁 중, 주민들이 대면하게 되는 가장 큰 문제는 식량의 공급이었습니다. 전쟁의 상태는 국가 생산의 부족한 부분에 대한 소모품의 수입을 불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정부는 배급량을 정하고, 물가상승을 통제하기 위한 최고가를 도입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 암시장이 성행하였고 도시와 지방 사이의 높은 긴장감을 가져왔습니다. 물자의 결핍 , 가격 상승 과 구매력 의 손실은 사회 갈등을 촉발시켰습니다. 이러한 불만들은 노동자로 하여금 노동 조합을 구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1916년 9월, 철강 산업 의 처음 두 노조가 탄생했습니다. 한 노조는 Esch-Sur-Alzette 의 광물유역 근처에서 , 나머지 노조는 도시에서 출범하였습니다. 1917 년 철강노조파업이 일어났고, 이는 독일 군대에 의해 제압되었습니다.

룩셈부르크와의 합병은 독일의 승전기념목표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그 사이에 독일당국은 특정 제제를 부과했습니다.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점령기에 발생했던 어려움은 수많은 룩셈부르크 국민이 나치 정권의 피해자로 죽어간 1940년부터 1944년 사이의 어려움과는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2 차 세계 대전 동안의 탄압은 국민 연대의 놀라운 단결을 불러왔습니다. 이는 점령군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으로 이어졌습니다. 반면 1차 세계대전동안의 룩셈부르크는 심각한 내부 갈등을 겪었던 나라로 비추어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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