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룩셈부르크 역사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룩셈부르크 역사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5년 4월 30일 목요일

룩셈부르크에 대한 오해와 진실

Q. 룩셈부르크는 왕이 다스리는 나라이다? 

A. 아닙니다. 19세기의 룩셈부르크 대공국은 군주제처럼 대공작에 의해 통치되는 형태였으나, 오늘날에는 입헌군주제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입헌군주제 체제아래에서는 대공작의 권력이 헌법에 의하여 제한을 받기 때문에, 대공작이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대공작은 룩셈부르크 국민들에게 국가 수장의 상징으로서 존재하며, 실질적으로 나라를 통치하는 역할은 선거를 통해 선출된 총리와 민주주의 의회에게 있습니다.


Q. 룩셈부르크는 네덜란드에서 독립한 나라이다?

A.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나폴레옹 전쟁 이 후, 유럽의 지도는 다시 쓰여지게 되었습니다. 1815년 비엔나 회의에서 네덜란드 연합 왕국이 신생이 결정되면서, 현제의 벨기에 지역과 룩셈부르크 지역은 네덜란드 연합 왕국의 오랑주-나사우 왕가의 빌럼 6세(=새 연합왕국의 빌럼 1세)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는 이 후 룩셈부르크 대공작의 칭호를 부여받게 됩니다. 이로써 룩셈부르크 대공국은 네덜란드 연합왕국과 동군연합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지리학적으로 룩셈부르크 역시 네덜란드 왕국의 한 부분이 될 수 도 있었지만, 비엔나회의에서 공국에서 대공국으로 승격되며, 정치적으로 분리된 독립국의 지위를 부여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서류상으로 네덜란드와 다른나라로 구분되었던 룩셈부르크는 실제로는 네덜란드의 국왕 빌럼1세 에게 다스려 진다는 것에 있어서 별 차이는 없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룩셈부르크 대공국을 마치 그의 왕국의 18번 째 지방주인 것 처럼 통치하였습니다.

룩셈부르크의 대공작-가가 네덜란드 왕가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고, 역사적으로 네덜란드가 룩셈부르크의 근대사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독자적인 독립국의 지위는 계속 유지하고 있었기에, 네덜란드의 영향력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로서의 독립은 맞지만, 이 것은 네덜란드라는 나라에서 분리된 나라라는 의미의 독립은 아니며, 네덜란드 국왕이 룩셈부르크 공작을 겸임하던 것이 끝나면서, 네덜란드-룩셈부르크 연합의 해체가 이루어 진 것으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어떤 외국인이 일제강점기라는 힘든시기를 지낸 우리에게 ' 한국은 일본으로 부터 독립한거 맞잖아~ ' 라고 말한다면, 역사적으로 틀린 말은 아닐지라도, 기분은 나쁘겠죠? 신랑은 '뭐 그정도로 기분 나쁠거 까지는 아니야~' 라고 말하기는 하는데, 그래도 사실관계는 명확하게!)


Q. 세계2차대전당시 침공당하지 않았다? 

A. 아닙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22년 후, 1940년 5월 10일, 룩셈부르크는 다시 독일군의 점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과거의 전례를 반면교사로 삼아, 여대공 샤를로테와 정부는 런던과 캐나다 등지로 망명하여 나치군과 맞서 싸우게 되었습니다. 연합군과의 손 잡은 룩셈부르크는 전쟁 후, 다시 승전국의 하나로서 국제적인 승인을 얻게 되고, 국제사회에서의 기반을 굳건히 할수 있었습니다.

독일과의 합병을 위한 나치 정권의 강렬한 선전 캠페인이 룩셈부르크 사람들에게 강요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것은 국민들의 반감만을 불러올 뿐 이었습니다. 나치군은 1942년 8월 30일 강제징집을 실시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룩셈부르크 곳곳에서 전국적인 시위의 도화선을 지피웁니다. 나치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21명의 시위자를 처형하였습니다. 총 10,211명의 룩셈부르크 국민이 강제징집에 동원되었지만, 그 중 1/3이 넘는 사람들은 나치군복을 입을 것을 거부하고 은신하였습니다. 이러한 반응에 대해, 나치군의 강제 송환, 강제 수용소 와 처형과 관련된 공포의 통치가 촉발되었습니다.

전대미문의 상황 속에서도 국민 대부분은 놀라운 단합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다른 나치 점령 지역에서와 같이 저항 조직이 생겨났고, 그들의 주요 활동 중 하나는 징병제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숨겨주는 것이었습니다. 1944년 9월 10일, 룩셈부르크는 미국에 의해 자유를 되찾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치군은 모젤강을 따라 전투병력을 배치하였고, 1944 년 12 월 역습을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2월 22일 비안덴 지역의 해방, 4월 14일 여대공인 샤를로테의 귀환 그리고 1945 년 5월 8일 독일의 무조건적인 항복을 마지막으로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Q. 식민지 침탈을 통해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A. 이러한 루머는 아마도 룩셈부르크가 네덜란드의 지배하에 놓여있던 시기에 대한 오해와 같은 맥락에 놓여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룩셈부르크는 네덜란드가 식민지 지배 및 교역으로 승승장구 하고 있을 당시,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의 영향을 받고 있었으며, 19세기 초 까지만 하더라도 소규모 수공업중심의 농업국가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실제 룩셈부르크의 공업혁명을 이끌었던 것은 1840년초 룩셈부르크 남부에 매장된 철광석의 발견과 1842년 관세동맹의 가입이었습니다.

<위키피디아 출처> 네덜란드 제국(Dutch Empire)은 17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네덜란드 공화국이 본국과 식민지를 확대해 구축한 식민지 지배 및 교역 체제를 가리킨다. 17세기 초 네덜란드 공화국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여, 동인도에 진출해 포르투갈에서 향료 무역을 빼앗았으며,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도 설립하는 등 점차 식민지를 확대하고 황금 시대를 맞았다. 17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 식민지주의 대국으로 도약하였다. (네덜란드가 차지한 가장 큰 식민지는 지금의 인도네시아로, 본토의 50배나 되는 크기의 식민지를 약 300년간 차지하고 있었다)

2015년 3월 25일 수요일

대공작가문 (the Grand-Ducal Family)

룩셈부르크 나사우—바일부르크 공작가 

네델란드의 빌럼3세의 사 후, 룩셈부르크는 1890년부터 나사우-바일부르그라고 불리우는 독자적인 공작가(Nassau-Weilburg)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A) 초대 대공 아돌프 (1817~1905) 
1. 1890년 73세의 나이로 나사우—바일부르크 공작가의 초대대공으로 취임했다. 
2. 1905년 11월 7일88세의 나이로 Hohenburg의 자신의 성 에서 사망했다. 



B) 2대 대공 빌럼IV세 (1852~1912) 
1. 아돌프공의 장남으로 1902년 대공세자로 임명되어, 1905년 2대 대공직을 승계받았다.
2. 1908 년 건강 문제상의 문제로 공작비인 마리-앤이 대리정치를 하게 된다. 
3. 1912 년 빌럼IV 는 남성 후계자 없이 사망했다. 대공비 마리-앤 사이에 6자녀를 두었다: 마리-아델레이드 (1894), 샤를로테 (1896), 힐다 (1897), 안토니아 (1899), 엘리자베스 (1901), 소피 (1902). 





C) 3대 여대공 마리-아델레이드(1894~1924) 
1. 살라카 법에 의해 여성후계자는 승계대상자가 아니었지만, 1907년 법 개정으로, 빌럼IV의 사후, 1912년 6월 18일 마리-아델레이드가 (여)대공직을 승계받았다. 
2. 2년후인 1914년 8월 2일 독일군이 룩셈부르크를 침공한다. (세계1차대전) 마리와 룩셈부르크 정부는 독일군의 점령과 정치개입에 항의 했지만 룩셈부르크의 중립성을 지키기에는 역부족 이었다. 
3. 독일군의 후퇴 이후, 좌파세력의 대표는 의회에서 공작가의 퇴위를 요구했다. 그들은 전쟁 중에 점령군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과 정치적으로 우파세력을 지지하던 것에 대해 대공을 비난했다. 
4. 1919년 1월 9일, 마리-아델레이드는 여대공의 지위를 동생인 샤를로테에게 양위하기로 결정했다. 
5. 룩셈부르크를 떠나 이탈리아에서 지내오다,1924년 1월 24일 고국의 Hohenburg 성에서 사망했다.


D) 4대 여대공 샤를로테 (1896-1985) 
1. 1919년 여대공으로 즉위 한 후, 헌법 개정으로 모든 룩셈부르크 시민(남성뿐 아니라 여성에게도) 선거권이 주어졌다. 국가 주권은 공작가가 아닌 공식 헌법과 국민 주권으로 부터 나온다는 것을 천명하면서, 동시에 공작가의 영향력은 제한되었다. 
2. 1919년 9월 28일 국민투표가 진행되었고, 국민의 78%가 공작가의 존립을 지지했다. 
3. 1919년 11월 6일 부르봉-파르마가의 펠릭스 왕자와 혼인한다. 슬하에는 6자녀를 두었다: 장 (1921), 엘리자베스(1922) 마리-아델레이드(1924), 마리-가브리엘(1925) 찰스(1927), 알렉스(1929). 
4. 국제적으로 중립적 입장을 유지하려 애썼으나, 1933 년 나치 정권이 들어서고 1940년 5월 10일 다시한번 침공을 받게 되면서(세계2차대전), 사실상 독립성을 상실, 공작가는 프랑스로 시작해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 미국, 캐나다 등지로 망명길에 올랐다. 
5. 샤를로테는 연합군에 합류하여 독일군에 맞서기로 결정했다. 망명길에도 에서 BBC 라디오 를 통해 룩셈부르크 국민을 격려했다. 이러한 현명한 처사로 인해 룩셈부르크는 종전 후, (규모는 작았으나)승전국의 하나로서 국제적인 승인을 얻게 되고, 국제사회에서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6. 1945년 4월 14일 망명에서 돌아온 샤를로테는 민중으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녀는 더 이상 단순히 상징적 직책으로서의 여대공이 아닌, 국가의 독립과 저항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샤를로테는 전쟁으로 황폐화 된 지역을 방문하여 민중을 위로하는 등 국민연대강화와 국가재건에 힘썼다. 
7. 45년의 통치이후, 1964년 장남인 장에게 공작직위를 물려주고 은퇴, 1985년 7월 9일 사망했다. 


E) 5대 대공 장(1921~) 
1. 1940년 샤를로테와 함께 망명길에 올라, 1942년 아일랜드 경비군에 자원, 연합군으로 활동했다. 
2. 샤를로테가 망명길에서 돌아온 후, 그 해 룩셈부르크 군의 대령으로 임명된다. 
3. 1953년 4월 벨기에의 공주 조세핀-샤를로테와 혼인한다. 슬하에 5자녀를 두었다: 마리-아스트리드 (1954), 앙리(1955), 장(1957), 마르게레타(1957), 기욤 (1963). 
4. 1961년 4월 28일 대공세자로 임명되어, 1964년 11월 12일 대공직을 승계받았다. 
5. 36년의 통치이후, 2000년 장남인 앙리에게 공작직위를 물려주고 은퇴했다. 


F) 6대 대공 앙리(1955~) 
1. 1955년 4월 16일, 룩셈부르크 Betzdorf 성에서 태어났다. 룩셈부르크와 프랑스에서 중/고등교육을 마친 뒤, 1974년 영국의 왕립군사학교에서 장교로서의 교육도 받은 후, 제네바대학에서 정치학을 수료했다.
2. 1981년 2월 14일, 대학 재학시절 만난 마리아-테레사와 결혼했다. 슬하에 5자녀를 두었다: 기욤 (1981) 펠릭스 (1984) 루이 (1986) 알렉산드라 (1991) - 세바스티앙(1992). 
3. 1998 년 3 월 에서 헌법 제 42 조 4 항에 따라 대공세자로 임명되었다. 2000 년 10 월 7일, 대공직을 승계받았다. 그는 현재 룩셈부르크의 6대 대공이다. 




*마리아-테레사 대공비 
2000 년 10 월 남편인 앙리가 대공작으로 즉위 할 때, 그녀 역시 대공비로 승격되었다. 마리아는 미국으로 망명한 쿠바인이다. 제네바대학 재학시절부터 그녀는 인도주의와 사회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가져왔다. 그녀의 모국어는 스페인어이며, 불어,영어,룩셈부르크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등을 구사한다. 그녀는 1997년 6월 10일 유네스코 친선 대사로 임명되었으며, 1981년 그녀의 이름으로 장애인과 소외 계층을 위한 재단을 설립했다. 그녀는 또한 에이즈 연구 재단의 명예 회장이다. 


*기욤 대공자 
기욤은 1981 11월 11 일에 앙리대공과 마리아-테레사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룩셈부르크에서 중/고등교육을 마친 뒤, 2001년 영국의 왕립군사학교에서 장교교육을 받은 후, 제네바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받았다. 2000 년 12 월18일에 기욤왕자는 대공세자로 임명되었다. 정신장애인을 위한 재단에서 아버지를 도와 공작가의 도덕적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있다. 기욤은 유창한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 및 스페인어 를 구사하며 스카우트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샤를로테, 대공비 조세핀, 대공비 마리아-테레사,대공자비 스테파니>

참고 : The grand ducal family of Luxembourg


2014년 8월 26일 화요일

룩셈부르크 : 1945년 이후의 경제변화

룩셈부르크 대공국은 생활 수준의 지속적인 개선과 사회적 평화를 보장하는 결과를 가져온 놀라운 경제 발전을 이룩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강산업에 지나치게 치우친 경제구조로 인해, 1974 년 철강산업의 위기와 함께 심각한 구조적 위기를 맞닥뜨리게 되었습니다. 

1974 년부터 1992 년 사이, 강철 생산은 50 % 이상 감소하고, 철강 산업의 인력은 30 % 이상 감축 되었습니다. 1997 년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용광로가 폐쇄 되었습니다. 오로지 현대화가 이루어진 몇몇의 철강 산업만이 위기에서도 살아남았을 뿐입니다. 이러한 위험을 예측하고, 룩셈부르크 당국은 1950년 후반부터 산업구조의 다양화 정책을 마련하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결국은 제3차산업(서비스업)이 철강산업을 뒤이어, 룩셈부르크 경제의 원동력으로 우뚝서게 되었습니다.



1960 년대는 금융 산업의 붐이 일어났습니다. 룩셈부르크 대공국은 제한적인 외국 법률 및 유로-달러 시장의 발전을 통해 이득을 보았습니다. 여러 국제 은행들이 룩셈부르크에 설립되었습니다. 오늘날, 금융 센터는 다양한 활동으로, 룩셈부르크의 국내 총생산(GDP) 중에서 다섯번째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룩셈부르크 당국은 이처럼 금융 또는 시청각 분야와 같은 특정 유망 경제 분야를 성공적으로 관리 개발 하였습니다. 이 것이 룩셈부르크의 성공의 열쇠 중 하나입니다.



전망들


룩셈부르크 대공국은 21 세기의 초입의 다원주의 사회를 완벽하게 반영하는 나라입니다. 오늘날 유럽 ​​공동체에서 급속한 인구증가의 원인은 이민이 거의 독점적입니다. 게다가 이민자 수의 증가와는 대조적으로 저출산으로 인해 룩셈부르크 대공국의 주민수는 거의 일정하게 유지 되고 있습니다. 그 결과, 룩셈부르크 주민과 외국인 사이의 증가하는 불균형이 사회의 분열을 야기할 위험이 있습니다. 룩셈부르크 당국은 따라서 사회 통합의 일환으로 적극적인 정치적 참여와 룩셈부르크에 살고 있는 여러 국적을 가진 외국인들의 룩셈부르크어 사용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가속되고 있는 세계화 추세를 고려해 볼 때, 룩셈부르크는 집단의 정체성 뿐만아니라 사회 경제적 특이성의 보존에 성공한 좋은 모델이라고 여길수도 있겠습니다. 

2014년 6월 13일 금요일

룩셈부르크 : 세계속으로의 발걸음



세계 2차 대전은 룩셈부르크의 외국인 정책에 대한 방향전환을 가져왔습니다. 연합군에 속하여 전쟁에 참전하였기에 룩셈부르크는 중립 상태를 포기하는 대신, 1945 년 이후 형성된 국제 사회에서 그 자리를 보장받게 되었습니다. 룩셈부르크 대공국은 전후 기간의 모든 다자간 협력 기관들(유엔기구, 베네룩스, 유럽경제협력기구(OEEC), 브뤼셀 협약, 유럽의회, 나토(NATO))의 창립멤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개방은 유럽 통합의 틀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그 것은 유럽 연합의 역사적인 탄생 배경이, 룩셈부르크에서 태어났으며 프랑스인 아버지와 룩셈부르크인 어머니를 둔 프랑스 장관, 로버트 슈만(Robert Schuman)으로부터 시작 된 것은 아마도 우연이 아니었을 것 입니다. 그는 양쪽 문화의 영향을 골고루 받은 교육을 받았으며, 이 것은 프랑스와 독일사이의 화해를 위한 위대한 작업의 기초를 제공하였습니다. 1950년 슈만이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의 창설을 제창할 때부터, 룩셈부르크는 이에 직접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탁월한 수완으로 유럽석탄철강공동체의 본부가 1952 년 룩셈부르크 성공적으로 안착하게 됩니다. 유럽석탄철강공동체의 창설로 대공국의 주요자원인 철강산업은 초국가적인 통제하에 놓여지게 되었습니다.

1957년 프랑스, 서독, 이탈리아, 벨기에, 네델란드 그리고 룩셈부르크는 로마조약에 의해 유럽경제공동체(EEC)를 발족하고, 원자력공동체(Euratom)를 통제하게 되었습니다. 철강 산업은 룩셈부르크가 유럽공동체에 필요한 자격을 갖춘 회원이 될 수 있도록 조력하였습니다.  이 것은 위험요소가 있었지만 또한 룩셈부르크에게는 기회이기도 하였습니다. 룩셈부르크 도시는 유럽의회사무국, 헌법재판소, 유럽투자은행, 여러 유럽위원회의 서비스, 출판 사무소 등등 을 유치하며 유럽 커뮤니티의 중심으로 우뚝 서게 됩니다. 

비록 작은 나라 였지만, 룩셈부르크 대공국은 하나된 유럽의 건설에 적극적인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Pierre Werner(1913-2002)총리는 유럽의 조상으로 여겨집니다. 그는 1970 년대초 유럽위원회에서 통화 동맹 프로젝트(베르너 플랜)를 발표 했습니다. 국경 통제를 폐지에 관한, (룩셈부르크 마을의 이름에서 따 온) 쉥겐 협정의 최초의 계약이 1985 년 체결 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룩셈부르크 정부인사, Gaston Thorn (주재기간:1981-1985) 와 Jacques Santer(주재기간:1995-1999) 각각 유럽위원회에 주재하게 되었습니다. Joseph Bench(1887-1975)에서 쟝-클로드 융커(Jean-Claude Junker 1954~ )까지 룩셈부르크의 정치가들은 유럽의 협상 테이블 에서 탁월한 중재자 역할을 해내었습니다. 유럽 ​​헌법에 대한 2005 년 국민 투표의 결과, 룩셈부르크 국민의 대부분은 유럽 연합의 통합을 계속 지원하기를 원하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2014년 6월 6일 금요일

룩셈부르크 : 세계 2차 대전 시기의 시련


1945년 4월 14일 망명을 끝내고 돌아온 샤를로테 여대공, 대공부 펠릭스, 대공자 쟝, 대공녀 알릭스가 그량듀칼 궁전의 발코니에 서서 환호하는 군중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지 22년 후, 1940년 5월 10일, 룩셈부르크는 다시 독일군의 점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대공가는 이례없는 큰 시련을 겪게 되었습니다. 과거의 전례를 반면교사로 삼아, 여대공 샤를로테와 정부는 런던과 캐나다 등지로의 망명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현명했던 처사였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연합군과의 손 잡은 룩셈부르크는 전쟁 후, 다시 승전국의 하나로서 국제적인 승인을 얻게 되고, 국제사회에서의 기반을 다지게 될 것을 보장 받았기 때문입니다. 

나치군의 점령은 룩셈부르크의 독립성의 상실을 의미했습니다. 1940년 7-8월 룩셈부르크는 독일의 지배하에 놓이게 됩니다. 코블렌츠-트리어지구의 지구 지도자인 구스타프 시몬은 룩셈부르크 민정의 수장으로 임명됩니다. 처음부터 그의 계획은 사실상 룩셈부르크 국민들과 독일과의 합병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룩셈부르크의 모든 체계들는 폐기 되었습니다. 프랑스어의 사용은 금지되었습니다.  나치 정권에 대한 강렬한 선전 캠페인이 룩셈부르크 사람들에게 강요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은 국민들의 반감을 불러올 뿐 이었습니다. 1941년 국가, 민족, 언어 사용에 대한 중요한 질의가 이루어진 국민조사에서 대부분의 국민들은 룩셈부르크 어로 응답하였습니다. 이 것은 흡수합병을 시도하는 나치군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을 반영한 결과였습니다. 나치군은 더 나아가, 1942년 8월 30일 알자스와 로렌 그리고 룩셈부르크에서 강제징집을 실시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룩셈부르크 곳곳에서 전국적인 시위의 도화선을 지피웁니다. 나치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21명의 시위자를 처형하였습니다. 총 10,211명의 룩셈부르크 국민이 강제징집에 동원되었습니다. 그 중 1/3이 넘는 사람들은 나치군복을 입을 것을 거부하고 은신하였습니다. 이러한 반응에 대해, 나치군의 강제 송환, 강제 수용소 와 처형과 관련된 공포의 통치가 촉발되었습니다. 특히 유대인 사회는 나치군에게 고통받았습니다. 전쟁 이 전 3,700명의 거주 유대인들 중, 홀러코스트 기간동안 1,200명이 비명행사하였습니다. 

전대미문의 상황 속에서도 국민 대부분은 놀라운 단합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다른 나치 점령 지역에서와 같이 저항 조직이 생겨났고, 그들의 주요 활동 중 하나는 징병제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숨겨주는 것이었습니다. 1944년 9월 10일, 룩셈부르크는 미국에 의해 자유를 되찾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치군은 모젤강을 따라 전투병력을 배치시키는데 성공하였고, 1944 년 12 월 역습을 시작하였습니다. 불게에서의 전투는 룩셈부르크 동쪽과 북쪽에 거대한 혼란을 초래했습니다. 2월 22일 비안 덴의 해방,  4월 14일 여대공인 샤를로테의 귀환 그리고 1945 년 5월 8일 독일의 무조건적인 항복을 마지막으로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전쟁의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무력 분쟁과 나치 테러의 결과로 룩셈부르크의 전체 국민의 약 2%인 5,700명이 사망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전쟁 이 후 본격적인 국가재건에 돌입했습니다. 마샬 계획의 일부로 받은 미국의 원조 덕분에,  현대화 및 인프라의 측면에서 상당한 진전이 이루어졌습니다. 

망명을 끝내고 돌아온 샤를로테

참조 :  History of the Grand duchy of Luxembourg

2014년 5월 19일 월요일

룩셈부르크 : 정치적 위기 그리고 1919 국민투표



독일군의 후퇴 직 후, 위기는 바로 찾아왔습니다.  좌파세력의 대표는 의회에서 공작가의 퇴위를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전쟁 중에 점령군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과 정치적으로 우파세력을 지지하던 것에 대해 대공을 비난했습니다. 발의는 가까스로 저지되었습니다. 국제적으로도 룩셈부르크 정부는 여대공 마리-아델레이드에 관한 비판에 직면해야했습니다. 프랑스와 벨기에는 룩셈부르크의 독립에 반향의 위험을 지닌 비밀 협상들을 수행 하였습니다. 1919년 1월 9일, 룩셈부르크 자원군은 반란을 일으키고, 공공 안전 위원회는 룩셈부르크가 공화국임을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프랑스 군대의 신속한 개입에 의해 저지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대공 마리-아델레이드 의 위치는 ​​확실히 위태로워지게 되었습니다. 1919년 1월 15일, 마리-아델레이드는 여대공의 지위를 동생인 샤를로테에게 양위하기로  지체없이 결정 하였습니다. 

위기를 완화하기 위해, 룩셈부르크 정부는 두가지의 안건에 관한 국민투표를 실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국민은 국가의 형태(대공국으로 머물 것인지 아니면 공화국으로 나아갈지)와 국가의 경제 방향의 형태(관세 동맹의 탈퇴여부)에 대한 결정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승전국들이 베르사유에 모여 유럽의 지도를 다시 그리려던 때, 윌슨의 민족 자결 원칙에 따라 국민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인상을 주려는 의도가 있었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여대공의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서 국민투표가 실시 되었습니다. 1919년 9월 28일, 첫 보통 선거가 처음으로 실시되고, 투표자의 대다수는 군주제 유지에 찬성(80%) 하였으며, 프랑스와의 경제 연합(73%) 을 지지하였습니다.


양대전사이의 기간

1920 년대의 경제 복구 후, (룩셈부르크는 해를 입지 않았지만) 세계 경제 선언을 촉발하는 위기가 1930 년대에 다시 찾아왔습니다. 불경기로 인한 정리해고는 일이 없으면 본국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이주노동자들에게 특히 많은 영향을 미쳤기에 대공국은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의 실업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경제 위기는 공산당에 어느 정도의 힘을 실어 주게 되었습니다.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광산등지의 노동자들 사이에 인기 얻었지만, 보수원 사이에서 우려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1937 년에 정부는 정치 와 사회 질서를 보호하기 위해서 라는 명분을 앞세워 공산당을 불법화 하려 했습니다.  반대세력의 힘을 무력화 하기 위해 법을 이용해 탄압했던 것입니다. 의회의 찬성에도 불구하고, 유권자의 대부분은 의사표현의 자유를 침해 할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국민 투표에서 공산당의 해체를 거부했습니다. 

국제적으로 룩셈부르크는 여전히 중립을 유지하면서, 제네바에 있는 국제연맹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그 위치를 강화 하였습니다. 그러나 1933 년 독일에서 나치 정권의 창설됨으로써 외부로부터의 위협의 그림자가 다시 한 번 드리워지게 되었습니다.

참조 :  History of the Grand duchy of Luxembourg

2014년 3월 4일 화요일

룩셈부르크 : 1차 세계대전 시기


1867 년, 런던회의에서 열강들의 보장하에 영세중립국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제사회에서 중립국으로서의 룩셈부르크의 위치는 불안정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각 유럽의 위기상황 마다 룩셈부르크의 문제는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고,  이웃국가들의 숨겨진 합병 욕망을 고조시켰습니다. 1914 년, 룩셈부르크는 세계 1차대전에 휘말렸습니다. 1914년 8월 2일, 독일의 군대는 대공국을 침략하여, 중립국을 침략할 수 없다는 조약을 위반했습니다. 룩셈부르크 당국은 독일의 침공에 항의하였으나, 독일군대는 침공 후, 룩셈부르크에 주둔하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국가의 기관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습니다. 나라의 주권과 주 정부는 자리에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전쟁 이 후, 연합군은 룩셈부르크의 중립정책을 비판하였습니다.

전쟁 중, 주민들이 대면하게 되는 가장 큰 문제는 식량의 공급이었습니다. 전쟁의 상태는 국가 생산의 부족한 부분에 대한 소모품의 수입을 불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정부는 배급량을 정하고, 물가상승을 통제하기 위한 최고가를 도입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 암시장이 성행하였고 도시와 지방 사이의 높은 긴장감을 가져왔습니다. 물자의 결핍 , 가격 상승 과 구매력 의 손실은 사회 갈등을 촉발시켰습니다. 이러한 불만들은 노동자로 하여금 노동 조합을 구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1916년 9월, 철강 산업 의 처음 두 노조가 탄생했습니다. 한 노조는 Esch-Sur-Alzette 의 광물유역 근처에서 , 나머지 노조는 도시에서 출범하였습니다. 1917 년 철강노조파업이 일어났고, 이는 독일 군대에 의해 제압되었습니다.

룩셈부르크와의 합병은 독일의 승전기념목표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그 사이에 독일당국은 특정 제제를 부과했습니다.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점령기에 발생했던 어려움은 수많은 룩셈부르크 국민이 나치 정권의 피해자로 죽어간 1940년부터 1944년 사이의 어려움과는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2 차 세계 대전 동안의 탄압은 국민 연대의 놀라운 단결을 불러왔습니다. 이는 점령군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으로 이어졌습니다. 반면 1차 세계대전동안의 룩셈부르크는 심각한 내부 갈등을 겪었던 나라로 비추어졌었습니다. 

2014년 1월 15일 수요일

룩셈부르크 : 경제성장

1839년 이후 신생국가인 룩셈부르크에 가장 도전적인 일은 실행가능한 경제 계발 계획을 진행 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룩셈부르크는 시대에 뒤떨어진 농업국가 였습니다. 이 곳은 제혁, 섬유, 도기, 제지, 양조 등과 같은 소규모 수공업 중심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소수였었고 규모도 작았습니다. 룩셈부르크는 지리적 고립과 경제적 상황으로부터 힘든시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 작은 나라에게 경제발전의 의미는 나라의 개방을 의미했습니다. 1842년 룩셈부르크 대공국은 (19세기 독일의) 관세동맹에 가입합니다. 라인강 이변을 넘나드는 큰 시장과 연결될 수 있게 해주던 이 연합은 룩셈부르크에게 많은 이점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독일은 중공업을 개발하는데 필요한 자본과 노동을 제공 했습니다. 하지만 다가 올 경제무역을 위하여, (도시 간 의) 도로노선의 연결이 요구 되었습니다. 철도(라인들)의 건설은 -룩셈부르크와 티응빌(Thionville) 사이의 첫 연결은 1859년에 개시되었다- 대공국과 바깥세계를 연결했을 뿐만 아니라 국내 지역 또한 긴밀히 연결하게 되었습니다.  





관세동맹의 회원자격 그리고 철도 네트워크는 공업화 사회로 진입하는 유리한 조건들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실제) 룩셈부르크의 공업혁명을 이끌었던 것은 1840년초 룩셈부르크 남부에 매장된 철광석의 발견이었습니다. 1870년부터 계속 대규모의 철강작업들이 일어났습니다. 미네뜨(minette: 흑운모와 정장석(正長石)을 주성분으로 하는 황반암(煌斑岩)(lamprophyre)의 일종.)라고 불리우는, 인을 많이 함유한 룩셈부르크의 광석들을 처음에는 단점으로 여겨졌으나, 1879 년 영국의 시드니 토마스가 발견한 제강공법으로 룩셈부르크의 인이 함유된 선철은 강철로 변환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 개시 전 날, 룩셈부르크는 세계에서 가장 큰  철강 생산자들 여섯 나라 중 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1911년 뒤들랑주, 아이히, 부르바흐 등 세 개의 철강회사가 합병하여 룩셈부르크의 대표 철강업체인 아르베드(ARBED : Aciéries Réunies de Burbach-Eich-Dudelange )가 탄생하였습니다.

철강산업은 1973년 석유파동으로 인해 타격을 받고 쇠퇴하기 시작하기 전까지 룩셈부르크 주요한 경제산업으로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룩셈부르크의 노동인구의 25%의 고용과 거의 60%에 육박하는 국가산업총생산량을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철강산업은 룩셈부르크 국가재산의 주요 근원으로서, 산업시대동안 룩셈부르크 사람들이 영유하던 높은 수준의 삶의 근간이 되었던 산업이었습니다.


Avenue de la Liberté거리에 있는 前ARBED본사건물. 
높은 유지&보수 비용 때문에, 현재는 근교의 현대적건물로 이전되었다.

산업화는 나라의 인구와 사회구조를 변화시켰습니다. 나라북부의 외즐리의 농부들은 광산이나 공장에서 일하려고 그들의 땅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지역노동시장의 수요는 이들만으로는 충족되지 않았습니다. 1890년부터 지금까지다른나라로의 해외이민은 사실상 멈추었고 룩셈부르크는 이민국이 되었습니다. 외국인들은 여러물결은 타고 도착했습니다. 처음엔 독일인들이, 그다음엔 이탈리아인들이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1960년대부터 계속 포르투갈 사람들이 룩셈부르크로 이민을 오고 있습니다. 1910년 이민자는 이미 전체인구의 15.3%를 넘어섰으며, 오늘날, 이민자는 거의 42%에 육박하게 되었습니다. 노동 뿐만아니라, 자본과 시장에 대한 높은 해외 의존도는 룩셈부르크 경제의 영구적인 특성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룩셈부르크는 세계2차대전 직 후, 독일과의 관세동맹을 철회하고, 1921년 7월 25일 벨기에와의 경제및 통화연합( BLEU : Belgium-Luxembourg Economic Union)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이 조약은 50년동안 지속되는 것이었으나, 이 후 두 번 더 연장되었습니다. 아직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경제연합은 두 나라 사이를 오랫동안 하나로 묶어 놓았습니다. 벨기에 프랑이 보통 화폐로 통용되었기는 하지만 ,룩셈부르크는 룩셈부르크 통화를 발행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참고 : 네이버 백과사전, 위키피디아
History of the Grand duchy of Luxembourg,Wort.lu 기사

2013년 9월 30일 월요일

룩셈부르크 : 국가조직의 강화

우리는 있는 그대로 머물기를 희망한다 


1867년 위기가 찾아 왔을 때, 룩셈부르크 국민들은 빌럼3세에 대한 강력한 항의의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Mir wëlle bleiwe wat mir sinn“ (우리는 있는 그대로 머물기를 희망한다) 라는 슬로건은 룩셈부르크 국민들에게 인기를 얻었습니다.  독립적인 국가를 이룩하는 첫 번째 할 일은 제도적인 틀을 구성하는 것이었습니다. 1848년, 1856년 그리고 1868년 세 번의 연속적인 헌법개정으로 젊은 도시를 위한 기틀을 마련하게 됩니다. 또한 정부, 의회와 대공작 사이의 권력과 그에 따른 책임에 관한 공정한 균형을 유지하는데 중점을 두어 설립되었습니다.

룩셈부르크의 완전한 독립은 1890년 빌럼 3세의 서거 이 후에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민주주의는 남녀 모두에게 참정권이 주어진 1919년이 후에 이루어 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계 1차대전발발 전, 정치적 정당들의 출현으로 룩셈부르크의 정당정치가 시작됩니다. 사회당은 1902-1903년 사이, 자유주의 연합은 1904년에, 우파당은 1914년에 생성되었습니다. 공산당은 사회당으로부터의 분리 이 후 1921년에 설립되었습니다. 1919년 이후 모든 정치적 연립정부는 (1925-1926년과 1974-1979년을 제외하고) 쭉- 우파당에 의해 집권 되고 있습니다, 우파당은 1945년 이 후, 기독교 사회당 (CSV:Chreschtlech Sozial Vollekspartei)으로 이름을 바꾸고 현재까지도 다수여당으로 집권하고 있습니다. 

룩셈부르크인의 진정한 애국심의 발로는 1839년 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벨기에의 혁명을 지지하던 룩셈부르크인들은 벨기에로 부터의 분리를 아쉬워 했습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룩셈부르크인들은 그들의 나라에서 자유적인 자치권을 가지며 지낼 수 있는 장점들의 진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벨기에 혁명 20년 후인 1859 년, 최초의 철도청의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애국 노래는 이 후, 룩셈부르크의 진정한 국민가요로 불리우게 되었습니다. 

Kommt hier aus Frankräich, Belgie, Preisen,
Mir wellen iech ons Hémecht weisen,
Frot dir no alle Säiten hin,
Mir welle bleiwe wat mir sin.
In English, this reads:
Come here from France, Belgium, Prussia,
we want to show you our fatherland
ask in all directions,
We want to remain what we are.

하지만 Ons Hèmecht (우리의 조국)이 공식적인 국가로서 승인받으며 1864년 처음으로 공식적인 자리에서 울려 퍼지게 됩니다. 이 후 1895년 정식국가로 제정되었습니다.  Ons Hèmecht 는 미셀 렌츠의 시에 장-안토옌 진넨의 음악이 더해진 룩셈부르크의 국가입니다. 

Ons Hèmecht 듣기

19세기 중반부터 계속 된 룩셈부르크인의 애국심은 독일에 의해 흡수될 위험들이 높아지면서, 반독일 정서의 경향을 띄게 되었습니다. 1815년부터 1866년까지 룩셈부르크는 독일 연방에 가입되어 있었습니다. 독일로부터 거리를 두기 위하여 룩셈부르크는 프랑스에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룩셈부르크는 이중언어, 심지어 삼중언어를 하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어는 일상생활 뿐만 아니라 행정부와 사법부의 공식언어로 채택 되었습니다. 표면적으로 룩셈부르크는 프랑스와 가까워 지는 듯 보였지만, 사실 룩셈부르크는 독일, 프랑스 ,벨기에 어느쪽도 아닌 이 세 나라의 사이에서 중심을 잡으며 독립국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켜나가고 있었습니다.


2013년 9월 18일 수요일

룩셈부르크 : 자치권의 강화 (1839-1890)

Nicolas Liez: La ville de Luxembourg, 1870

1839년이 후로 더 이상 네덜란드와의 영토분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또한 대공은 하는 수 없이 분리된 행정부를 승인하였습니다. 네덜란드의 국왕인 빌럼2세(룩셈부르크 대공으로서의 재위기간 1840-1849)는 1841년 대공국을 방문해 "나는 룩셈부르크 대공국이 룩셈부르크 국민에 의해 통치 되기를 원한다" 라고 공표 하였습니다. 1841년 초 부터는 헌법의 보완과 수정도 허용되 었습니다. 서서히 자주적인 모습의 국가가 완성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작 170,000명의 국민을 가진 2,586 제곱킬러미터의 작은 나라가 완벽한 독립을 한다? 

처음에는 대공국은 독일 연방에 속해 있으면서, 네덜란드 왕가와도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서서히 이 들과의 관계를 끊는데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1866년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 으로 독일연방의 해체가 가시화 되었습니다. 프로이센의 확장에 직면하게 되면서, 프랑스는 영토적인 보상을 찾고 있었습니다. 룩셈부르크는 쉬운 희생자처럼 보였습니다. 나폴레옹 3세는 룩셈부르크를 네덜란드로부터 매입하고자 오백만 골드 프랑을 제시하였습니다. 빌럼3세(룩셈부르크 대공으로서의 재위기간 1849-1890)는 이 제안을 받아 들었습니다. 하지만 룩셈부르크 요새를 수비하던 프로이센은 이를 거부했습니다. 해결방안을 찾기위해 유럽강국은 또 다시 런던에 모였습니다. 

1867년 5월 11일 런던 열국회의 에서 룩셈부르크는 열강의 보장하에 영세중립국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독일연방 해체 후에도 여전히 룩셈부르크 내에 주둔하고 있던 프로이센군의 수비대도 요새에서 철수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전쟁에 이어 나폴레옹 3세의 외교적 패배를 명백히 드러낸 것으로, 이를 계기로 프로이센-프랑스 사이의 긴장이 더욱 가중되게 됩니다. 


아돌프 대공

1867년의 위기는 네덜란드 왕이 자국의 국왕과 룩셈부르크의 대공을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열강들의 야욕에 노출되어 있었다는 점에서부터 초래 되었던 것입니다.  1890년 빌럼3세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세 아들이 있었으나 모두사망), 룩셈부르크와 네덜란드의 개인적인 연합(네덜란드 국왕의 대공 겸임)은 끝나게 되었습니다. 

빌럼3세의 딸인 빌레미나가 네덜란드의 여왕으로 재위에 오르지만 (빌럼3세가 유명을 달리 할 무렵 헌법개정이 이루어지고, 이 후 딸도 후계자가 될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당시 미성년자였으므로 그녀의 어머니가 섭정했다.), 룩셈부르크 대공 지위는 나사우-바일부르그가의 아돌프에게 넘겨집니다.  그 결과 룩셈부르크는 1890년부터 나사우-바일부르그라고 불리우는 독자적인 왕가(Nassau-Weilburg)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나사우-바일부르그 왕가는 아돌프, 빌럼4세 마리-아델레이드, 샤를로트, 장 그리고 현재의 대공 앙리 공까지, 6명의 대공을 배출 하였습니다. 


참조 :  History of the Grand duchy of Luxembourg
위키피디아 & [네이버 지식백과] 룩셈부르크문제

2013년 9월 8일 일요일

룩셈부르크 : 비엔나회의 이 후, 현재의 국경을 구축하기까지 (1815-1839)


Congress of Vienna, 1815

1815년 나폴레옹 전쟁 이 후, 유럽의 지도는 다시 쓰여지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룩셈부르크 역시 영향을 받게 됩니다.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비엔나 회의에서는 네델란드 왕국을 독립시키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네덜란드 연합 왕국의 오랑주-나사우 왕가의 빌럼 6세는 나사우 백작령을 되찾는 대신 나사우 지역을 프로이센에게 넘기고 (엄마가 프로이센 국왕의 딸이었으므로 프로이센은 그의 외가였음),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와 리에주 주교령을 흡수하여 네덜란드 연합왕국을 구성하는 것으로 합의 하였습니다.  빌럼6세는 새 네덜란드 연합왕국의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오랑주-나사우의 빌럼 6세=새 연합왕국의 빌럼 1세)

지리학적으로 룩셈부르크 역시 네덜란드 왕국의 한 부분이 될 수 도 있었지만, 공국에서 대공국으로 승격되며 정치적으로 분리된 독립국의 지위를 부여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배권은 네덜란드의 국왕인 오랑주-나사우의 빌럼1세에 할당 되어 룩셈부르크는 네덜란드와 함께 오랑주-나사우 왕가의 깃발 아래 다스려지게 된 것 입니다. 빌럼1세는 이후 룩셈부르크 대공의 칭호를 부여받게 됩니다.  이로써 룩셈부르크 대공국은 네덜란드 연합왕국과 동군연합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사실 오랑주-나사우는 지금의 독일 베스트팔렌 지방의 왕조로, 1815년 나사우 지방이 프로이센에게 흡수 되면서, 룩셈부르크 대공국을 일종의 보상의 형식으로써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네덜란드 연합 왕국과 달리(오라네공 빌럼1세가 16세기 네덜란드 초대세습총독) 오랑주-나사우 왕가와는 전혀 관계 없던 룩셈부르크 대공국의 영토를 오랑주-나사우 왕가가 비엔나회의를 통해 얻게 되었던 것 입니다. 

룩셈부르크 국경 변천사 

1815년 서류상으로 룩셈부르크는 네덜란드와 다른나라로 구분되었지만, 실제로는 네덜란드의 국왕 빌럼1세 에게 다스려 진다는 것에 있어서 별 차이는 없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룩셈부르크 대공국을 마치 그의 왕국의 18번 째 지방주인 것 처럼 통치하였습니다. 네덜란드 기본법은 룩셈부르크에서도 적용되었고, 룩셈부르크의 대표자들은 네덜란드의 기관에서 일해야 했으며, 학교에서는 네덜란드어를 가르쳤습니다. 룩셈부르크 국민들이 이 것에 크게 반발하지 않는 동안, 네덜란드 정권은 경제부분과 특히 국가재정정치부분에 있어 룩셈부르크 국민들의 불만을 가중시켰습니다. 때문에 1830년 벨기에 지역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을 때,  룩셈부르크 국민들이 벨기에 독립군에 동참한 것은 결코 놀랄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수의 룩셈부르크 자원자들이 브뤼셀로 떠났고, 독립군에 가담했습니다. 1830년 10월 4일 벨기에독립군이 네덜란드 군과의 시가전에서 승리한 후, 임시정부를 수립해 벨기에 독립을 선포했습니다. 룩셈부르크의 대표자들의 일부는 벨기에 임시정부 수립을 돕게 되었습니다. 프로이센의 독립수비대에 의해 경호되고 있었던 룩셈부르크의 수도 만이 네덜란드 국왕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유럽열강들에 의해 독립 되었던 네델란드 처럼 벨기에도 유럽열강들의 이해관계 속에 독립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벨기회 의회는 이 결정을 받아들였으나 빌럼1세는 이를 거부하였고, 그 후 8년동안 대공국은 양국의 통치 아래에 놓여져 있었습니다. 룩셈부르크 도시에는 네덜란드의 빌럼공의 입김이 작용하는 동안, 도시 밖은 벨기에의 지휘권 아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결국 빌럼공은 유럽열강의 결정에 따르게 되었고, 1839년 4월 19일에 런던에서 최종조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이때 부터 룩셈부르크는 둘로 나뉘어 지게 되었습니다. 룩셈부르크 대공국은 오랑주-나사우 왕가에게 계속 승계되었고, 벨기에-룩셈부르크는 현재 벨기에의 지방주로 편입되었습니다. 룩셈부르크 대공국의 현재 국경은 1839년의 런던조약 이후로 현재까지 변화 없이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현재 룩셈부르크 국경

2013년 8월 24일 토요일

룩셈부르크 : 네덜란드 시기


14세기  당시 부르고뉴는 백년전쟁(1337-1453)을 통해 (당시 부르고뉴는 프랑스 지방에 속했지만 프랑스와 함께 싸우지 않고) 네덜란드와 영국편 에서 싸우게 됩니다.  백년전쟁 이 후 부르고뉴지방과 네덜란드는 매우 가까워졌고 부르고뉴의 필립 2세와 네덜란드의 플랑드르 지방의 마르그리트 공주가 1369년 부부가 됨으로써 플랑드르 지방은 부르고뉴 왕가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당시 왕족결혼에서 신부가 가져온 땅은 신랑쪽에게 귀속되었음) 1443년, 부르고뉴의 공작 필립 3세의 침입으로 룩셈부르크는 네덜란드령으로 통합되었습니다. 그리하야  이 시기 지금의 네덜란드, 벨기에 지방 전부가 부르고뉴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됩니다.  

필립 3세의 아들 칼이 아들을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나니 부르고뉴의 왕관은 그의 딸 마리에게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1477년 부르고뉴의 공주이며 왕위 계승자이 마리는 (앙숙인 프랑스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황제 막시밀리안 1세에게 시집을 가면서 네덜란드는 물론 부르고뉴까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막시밀리안 1 세 에게는 아들 필립과 딸 마르그리트가 있었는데 딸 마르그리트는 에스파냐 왕위 계승자인 후안과 결혼했고 아들 필리프는 에스파냐 공주 후아나와 결혼하여 네덜란드에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후안왕자가 결혼 6개월 만에 열병으로 급서하고 마르그리트가 낳은 유복자 또한 얼마 안가 죽어 트라스타마라 왕가의 장녀였던 포르투갈의 왕비 아라곤의 이사벨에게 계승권이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막시밀리안 1세



에스파냐 공주 후아나와 그녀의 아들 카를

1504년 이사벨 여왕이 죽자 왕위는 네덜란드에 살던 후아나 공주에게 넘어갔다가 그녀의 아들 카를에게 전해집니다. 그리하야 카를은 오스트리아의 황제이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1519년)이자 에스파냐 왕(카를로스 1세 :  1516년)이 됩니다. (-_-a; 태어날때부터 만렙찍고 나오다니...) 카를은 당시 서유럽을 이끌었던 왕조들 - 아라곤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의 트라스타마라 왕가, 부르고뉴 공국의 발루아-부르봉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 - 의 상속자로서 그는 중유럽과 서유럽 그리고 남유럽을 넘어 아메리카 대륙과 필리핀 제도의 카스티야 식민지까지 포함한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게 됩니다. 

당시 합스부르크가의 영토

에스파냐의 실질적인 통치는 카를이 오스트리아는 동생인 페르디난트가 맡아서 해오다가,  카를이 퇴위할 때 에스파냐와 네덜란드의 실질적인 통치가 힘들다고 보고 합스부르크 왕가를 둘로 분리하여, 에스파냐와 신대륙 식민지는 아들 펠리페 2세에게 주고 오스트리아는 페르디난트 1세가 계속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독실한 카톨릭인 펠리페 2세와 종교의 자유를 외치며 기독교를 믿으려는 네덜란드사이의 골은 더욱 더 깊어져 네덜란드 7개주 동맹의 독립군이 결성되고 처절히 싸우다 1568년 네덜란드는 에스파냐에 자주독립선언을 하며 1648년 30년 전쟁(1618-1648년에 걸쳐 30년간 유럽의 온나라가 신.구교로 갈라져 벌인 종교전쟁)의 결과로 네덜란드의 독립이 이루어 질때 까지 오랜 기간 투쟁하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초강대국 에스파냐에 굴복한 남부 열개의 주는 또 다시 에스파냐의 지배를 받게되고(1579년), 북부는 끝까지 저항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구교를 믿는 벨기에와 신교를 믿는 네덜란드로 사실상 오늘날의 국경이 정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펠리페 2세


16세기와 17세기 동안 룩셈부르크 공국은 다른 지역주들과 마찬가지로 에스파냐-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룩셈부르크는 유럽이라는 체스판 위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에스파냐-합스부르크가와 발루아 부르봉가 사이의 패권싸움에 여러번 휘말렸습니다. 룩셈부르크 도시는 "Gibraltar of the north"-북부의 천혜요새, 북부의 지브롤터 로 불리우며 꾸준히 그 명성을 유지해 왔습니다. 1659년 피레네조약 (Treaty of the Pyrenees: 30년전쟁 중에 시작한 에스파냐와 프랑스와의 전쟁을 끝맺음시킨 조약)을 통해 에스파냐는 룩셈부르크 공국의 남쪽지역(지금의 Thionville 지역)을 프랑스에 양도하였습니다. 1661년 루이 16세 가 프랑스의 왕으로 즉위하고  1684년 룩셈부르크의 요새는 루이 14세의 군대에 둘러 쌓였습니다. 그 후 1697년까지 프랑스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1697년 레이스베이크 조약을 통해 에스파냐는 점령당한 카탈루냐와 룩셈부르크 지역을 복구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1715년 에스파냐의 왕위 계승 전쟁에 의해 남쪽 네덜란드땅은 다시 오스트리아-합스부르그가에게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앞의 두세기와 달리, 18세기는 룩셈부르크에게는 평화로운 시절이었습니다.  카를 6세(재위기간 : 1715-1740), 마리아 테레지아(재위기간 : 1740-1780), 요셉 2세(재위기간 : 1780-1790)의 통치기간은 룩셈부르크 분만 아니라 다른 여러 지역에도 부흥기였습니다. 7개월간의 저항 끝에 1795년 프랑스 혁명군에게 요새를 점령 당하게 되면서, 룩셈부르크는 다시 프랑스로 편입되게 됩니다. 하지만 징병제의 도입, 의무 군 모집의 시스템은 Kleppelkrich (cudgel war)로 알려진 1798년 농민 반란을 발발하게 만들었습니다. 나폴레옹 집권시기, 온건적인 집권 방식은 대중들에게 더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참조: History of the Grand duchy of Luxembourg
위키피디아 & 먼나라 이웃나라 네덜란드편

2013년 8월 21일 수요일

룩셈부르크 : 신성로마제국 시기

룩셈부르크  대성당의 스테인 글라스 창에 새겨진 지그프리드 백작

14세기 초, 룩셈부르크가(家)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1308년 하인리히 7세 백작은 독일의 왕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재위기간 1308-1314) 그 후 1312년 (신성로마제국의) 로마황제 칭호를 추가적으로 획득하였습니다.  그의 아들인 존은 보헤미아 왕국(오늘날의 체코 영토부분)의 상속녀와 결혼해 보헤미아 왕의 칭호를 획득하였습니다. 


하인리히 7세 이후 룩셈부르크가에서는 

  • 카를 4세(재위기간 1346-1378)
  • 벤체슬라스(재위기간 1376-1400) 
  • 지기스문트(재위기간 1410-1437) 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직에 올랐습니다. 

1354년, 카를 4세는 룩셈부르크를 백작령에서 공작령으로 승격시켰습니다. 
1364년, 치니(chiny: 현재 룩셈부르크 경계 벨기에 지역)의 백작령의 영토를 획득하면서 룩셈부르크는 영토의 최대확장을 이룩하였습니다. 
1443년, 부르고뉴의 필립공작의 침입으로 룩셈부르크는 네델란드령으로 통합되었습니다. 
이 운명은 이 후 4세기동안의 지리적 & 정치적 통일과도 연결 됩니다. 

참조: History of the Grand duchy of Luxembourg

2013년 8월 11일 일요일

룩셈부르크 : 요새도시






요새도시 

963년 지그프리드 백작이 중세말 부터 "Bock"으로 불리우던 알제트강의 바위 곳을 획득했을 때, 그는 틀림없이 전략적 기준 역시 고려했을 것 입니다. 이 곳는 방어시설을 짓기에 최적의 장소였습니다. 백작은 그 곳에 성을 지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성 주변으로 작은 마을들이 형성되기 시작하고, 약 200년이 지난 후 하나의 도시라고 불리울 만한 여건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2세기 중반에 이르러 (오늘날 "Rue du Fossé" 까지 확장된) 견고한 성벽이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거주인구의 증가로 도시는 14세기 도시 서경으로까지 (오늘날의  Boulevard Royal) 확장되며 새로운 성벽을 구축하게 되었습니다.  도시면적은 5헥타에서 23헥타로 증가했습니다. 중세시대의 많은 도시들처럼 룩셈부르크 역시 하나의 요새도시가 되었습니다. 알제트강과 페트루세 강의 깊은 계곡들이 다방면에서(동쪽,남쪽, 북동쪽) 도시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적절한 보수에 의해 증강된 건축물의 위용과 함께 어마어마한 계곡의 높이까지 더해져 가히 천하무적이었습니다. 서쪽과 북서쪽으로 난, 성 밖으로 오갈 수 있는 길 역시 단단한 성문과 성벽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도시는 1443년 브루고뉴의 필립공작의 돌발적인 공격을 받기 이전까지 한번도 다른 이에게 점령된 적이 없었습니다. 룩셈부르크의 새로운 시대는 1354년 공작령을 부여 받으며 시작되었습니다. 이 후 네델란드령으로 통합되었다가 16-18세기 동안 발로아-부르봉왕가와 합스부르그왕가에 귀속 되었었습니다.

참조: www.lcto.lu/history

2013년 8월 6일 화요일

룩셈부르크 : 중세도시


   



중세도시 


"Lucilinburhuc" 라는 단어는 작은 요새라는 뜻도 있습니다. 이 표현은 아주 긴 시간 동안 도시를 위해 특성화 된 두가지 사실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첫번째로, 지그프리드에 의하여 얻게 된 이 바위 곶은 훌륭한 방어시설과 전략적 요충지로서 의 존재를 드러냈습니다. 룩셈부르크 도시는 1867 년에 해체 될 때까지 약 천 년 동안 요새도시로서의 명성을 지켜 왔습니다

두번째로, 이 도시는 역사상 한번도 거대도시로 존재한 적이 없었습니다. 14 세기의 초에 5,000여명의 시민으로 시작해 18세기 말까지 8,500여명의 시민들이 거주했습니다. 세계 1차 대전 이 후 46,500여명으로 급속히 증가한 이 후, 오늘날에는 82,000여명의 시민들이 살고 있습니다. 지그프리드는 바위 골짜기 위에 진정한 요새를 구축했습니다.  기사들과 군인들이 이 곳에 거주하게 되며, 공예가들과 상인들 역시 골짜기 아래 지역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위쪽 시가지와 아래쪽 시가지의 차이점이 두드러지게 되었습니다. 아랫마을을 둘러싼 돌성벽이 증축된 12세기 중후반 이후에서야 하나의 정식도시로 불리우기 시작했습니다. 

대개 도시의 기원은  종교적 장소, 수도원,  강 의 수로 또는 여러 길의 교차지점 등등 에서 유래합니다.  룩셈부르크 도시는 가파른 지역적 위치와 군사적 이용 등이 그 기원이 되었습니다. 


참조: www.lcto.lu/history

2013년 8월 2일 금요일

룩셈부르크 : 도시의 시작

Siegfried I


룩셈부르크의 이름과 기원은 한 사람으로 부터 시작됩니다.

서기 963년 카롤링거(Carolingian) 왕조의 핏줄인 아르덴의 지그프리드(Siegfried) 백작은 트리어의 St. Maximin 수도원으로 부터 알제트 강이 지나는 암벽 요새 지역을 아르덴의 Feulen 지역의 땅과 교환하고 Bockfelsen에 그의 성을 세웠습니다. 그 당시 소유권에 관한 문서를 보면, 이 작은 성을 Lucilinburhuc 이라고 지칭했습니다. 룩셈부르크의 이름은 (아마도 고대 로마에서 유래했을) 작은 성이라는 뜻의 Lucilinburhuc 이라는 단어에서 기원합니다. 그리하여 룩셈부르크 (Lëtzebuerg) 라는 이름이 역사에 처음으로 등장하기 시작 했습니다. 룩셈부르크는 처음에는 도시와 그 주변을 지칭했지만 점점 그 영역을 넓혀 종국에는 도시와 국가의 이름이 동일하게 불리우게 되었습니다.

참조: www.lcto.lu/history


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