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 13일 금요일

룩셈부르크 : 세계속으로의 발걸음



세계 2차 대전은 룩셈부르크의 외국인 정책에 대한 방향전환을 가져왔습니다. 연합군에 속하여 전쟁에 참전하였기에 룩셈부르크는 중립 상태를 포기하는 대신, 1945 년 이후 형성된 국제 사회에서 그 자리를 보장받게 되었습니다. 룩셈부르크 대공국은 전후 기간의 모든 다자간 협력 기관들(유엔기구, 베네룩스, 유럽경제협력기구(OEEC), 브뤼셀 협약, 유럽의회, 나토(NATO))의 창립멤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개방은 유럽 통합의 틀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그 것은 유럽 연합의 역사적인 탄생 배경이, 룩셈부르크에서 태어났으며 프랑스인 아버지와 룩셈부르크인 어머니를 둔 프랑스 장관, 로버트 슈만(Robert Schuman)으로부터 시작 된 것은 아마도 우연이 아니었을 것 입니다. 그는 양쪽 문화의 영향을 골고루 받은 교육을 받았으며, 이 것은 프랑스와 독일사이의 화해를 위한 위대한 작업의 기초를 제공하였습니다. 1950년 슈만이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의 창설을 제창할 때부터, 룩셈부르크는 이에 직접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탁월한 수완으로 유럽석탄철강공동체의 본부가 1952 년 룩셈부르크 성공적으로 안착하게 됩니다. 유럽석탄철강공동체의 창설로 대공국의 주요자원인 철강산업은 초국가적인 통제하에 놓여지게 되었습니다.

1957년 프랑스, 서독, 이탈리아, 벨기에, 네델란드 그리고 룩셈부르크는 로마조약에 의해 유럽경제공동체(EEC)를 발족하고, 원자력공동체(Euratom)를 통제하게 되었습니다. 철강 산업은 룩셈부르크가 유럽공동체에 필요한 자격을 갖춘 회원이 될 수 있도록 조력하였습니다.  이 것은 위험요소가 있었지만 또한 룩셈부르크에게는 기회이기도 하였습니다. 룩셈부르크 도시는 유럽의회사무국, 헌법재판소, 유럽투자은행, 여러 유럽위원회의 서비스, 출판 사무소 등등 을 유치하며 유럽 커뮤니티의 중심으로 우뚝 서게 됩니다. 

비록 작은 나라 였지만, 룩셈부르크 대공국은 하나된 유럽의 건설에 적극적인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Pierre Werner(1913-2002)총리는 유럽의 조상으로 여겨집니다. 그는 1970 년대초 유럽위원회에서 통화 동맹 프로젝트(베르너 플랜)를 발표 했습니다. 국경 통제를 폐지에 관한, (룩셈부르크 마을의 이름에서 따 온) 쉥겐 협정의 최초의 계약이 1985 년 체결 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룩셈부르크 정부인사, Gaston Thorn (주재기간:1981-1985) 와 Jacques Santer(주재기간:1995-1999) 각각 유럽위원회에 주재하게 되었습니다. Joseph Bench(1887-1975)에서 쟝-클로드 융커(Jean-Claude Junker 1954~ )까지 룩셈부르크의 정치가들은 유럽의 협상 테이블 에서 탁월한 중재자 역할을 해내었습니다. 유럽 ​​헌법에 대한 2005 년 국민 투표의 결과, 룩셈부르크 국민의 대부분은 유럽 연합의 통합을 계속 지원하기를 원하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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