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 6일 금요일

룩셈부르크 : 세계 2차 대전 시기의 시련


1945년 4월 14일 망명을 끝내고 돌아온 샤를로테 여대공, 대공부 펠릭스, 대공자 쟝, 대공녀 알릭스가 그량듀칼 궁전의 발코니에 서서 환호하는 군중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지 22년 후, 1940년 5월 10일, 룩셈부르크는 다시 독일군의 점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대공가는 이례없는 큰 시련을 겪게 되었습니다. 과거의 전례를 반면교사로 삼아, 여대공 샤를로테와 정부는 런던과 캐나다 등지로의 망명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현명했던 처사였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연합군과의 손 잡은 룩셈부르크는 전쟁 후, 다시 승전국의 하나로서 국제적인 승인을 얻게 되고, 국제사회에서의 기반을 다지게 될 것을 보장 받았기 때문입니다. 

나치군의 점령은 룩셈부르크의 독립성의 상실을 의미했습니다. 1940년 7-8월 룩셈부르크는 독일의 지배하에 놓이게 됩니다. 코블렌츠-트리어지구의 지구 지도자인 구스타프 시몬은 룩셈부르크 민정의 수장으로 임명됩니다. 처음부터 그의 계획은 사실상 룩셈부르크 국민들과 독일과의 합병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룩셈부르크의 모든 체계들는 폐기 되었습니다. 프랑스어의 사용은 금지되었습니다.  나치 정권에 대한 강렬한 선전 캠페인이 룩셈부르크 사람들에게 강요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은 국민들의 반감을 불러올 뿐 이었습니다. 1941년 국가, 민족, 언어 사용에 대한 중요한 질의가 이루어진 국민조사에서 대부분의 국민들은 룩셈부르크 어로 응답하였습니다. 이 것은 흡수합병을 시도하는 나치군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을 반영한 결과였습니다. 나치군은 더 나아가, 1942년 8월 30일 알자스와 로렌 그리고 룩셈부르크에서 강제징집을 실시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룩셈부르크 곳곳에서 전국적인 시위의 도화선을 지피웁니다. 나치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21명의 시위자를 처형하였습니다. 총 10,211명의 룩셈부르크 국민이 강제징집에 동원되었습니다. 그 중 1/3이 넘는 사람들은 나치군복을 입을 것을 거부하고 은신하였습니다. 이러한 반응에 대해, 나치군의 강제 송환, 강제 수용소 와 처형과 관련된 공포의 통치가 촉발되었습니다. 특히 유대인 사회는 나치군에게 고통받았습니다. 전쟁 이 전 3,700명의 거주 유대인들 중, 홀러코스트 기간동안 1,200명이 비명행사하였습니다. 

전대미문의 상황 속에서도 국민 대부분은 놀라운 단합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다른 나치 점령 지역에서와 같이 저항 조직이 생겨났고, 그들의 주요 활동 중 하나는 징병제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숨겨주는 것이었습니다. 1944년 9월 10일, 룩셈부르크는 미국에 의해 자유를 되찾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치군은 모젤강을 따라 전투병력을 배치시키는데 성공하였고, 1944 년 12 월 역습을 시작하였습니다. 불게에서의 전투는 룩셈부르크 동쪽과 북쪽에 거대한 혼란을 초래했습니다. 2월 22일 비안 덴의 해방,  4월 14일 여대공인 샤를로테의 귀환 그리고 1945 년 5월 8일 독일의 무조건적인 항복을 마지막으로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전쟁의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무력 분쟁과 나치 테러의 결과로 룩셈부르크의 전체 국민의 약 2%인 5,700명이 사망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전쟁 이 후 본격적인 국가재건에 돌입했습니다. 마샬 계획의 일부로 받은 미국의 원조 덕분에,  현대화 및 인프라의 측면에서 상당한 진전이 이루어졌습니다. 

망명을 끝내고 돌아온 샤를로테

참조 :  History of the Grand duchy of Luxembou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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