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8일 일요일

룩셈부르크 : 비엔나회의 이 후, 현재의 국경을 구축하기까지 (1815-1839)


Congress of Vienna, 1815

1815년 나폴레옹 전쟁 이 후, 유럽의 지도는 다시 쓰여지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룩셈부르크 역시 영향을 받게 됩니다.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비엔나 회의에서는 네델란드 왕국을 독립시키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네덜란드 연합 왕국의 오랑주-나사우 왕가의 빌럼 6세는 나사우 백작령을 되찾는 대신 나사우 지역을 프로이센에게 넘기고 (엄마가 프로이센 국왕의 딸이었으므로 프로이센은 그의 외가였음),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와 리에주 주교령을 흡수하여 네덜란드 연합왕국을 구성하는 것으로 합의 하였습니다.  빌럼6세는 새 네덜란드 연합왕국의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오랑주-나사우의 빌럼 6세=새 연합왕국의 빌럼 1세)

지리학적으로 룩셈부르크 역시 네덜란드 왕국의 한 부분이 될 수 도 있었지만, 공국에서 대공국으로 승격되며 정치적으로 분리된 독립국의 지위를 부여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배권은 네덜란드의 국왕인 오랑주-나사우의 빌럼1세에 할당 되어 룩셈부르크는 네덜란드와 함께 오랑주-나사우 왕가의 깃발 아래 다스려지게 된 것 입니다. 빌럼1세는 이후 룩셈부르크 대공의 칭호를 부여받게 됩니다.  이로써 룩셈부르크 대공국은 네덜란드 연합왕국과 동군연합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사실 오랑주-나사우는 지금의 독일 베스트팔렌 지방의 왕조로, 1815년 나사우 지방이 프로이센에게 흡수 되면서, 룩셈부르크 대공국을 일종의 보상의 형식으로써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네덜란드 연합 왕국과 달리(오라네공 빌럼1세가 16세기 네덜란드 초대세습총독) 오랑주-나사우 왕가와는 전혀 관계 없던 룩셈부르크 대공국의 영토를 오랑주-나사우 왕가가 비엔나회의를 통해 얻게 되었던 것 입니다. 

룩셈부르크 국경 변천사 

1815년 서류상으로 룩셈부르크는 네덜란드와 다른나라로 구분되었지만, 실제로는 네덜란드의 국왕 빌럼1세 에게 다스려 진다는 것에 있어서 별 차이는 없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룩셈부르크 대공국을 마치 그의 왕국의 18번 째 지방주인 것 처럼 통치하였습니다. 네덜란드 기본법은 룩셈부르크에서도 적용되었고, 룩셈부르크의 대표자들은 네덜란드의 기관에서 일해야 했으며, 학교에서는 네덜란드어를 가르쳤습니다. 룩셈부르크 국민들이 이 것에 크게 반발하지 않는 동안, 네덜란드 정권은 경제부분과 특히 국가재정정치부분에 있어 룩셈부르크 국민들의 불만을 가중시켰습니다. 때문에 1830년 벨기에 지역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을 때,  룩셈부르크 국민들이 벨기에 독립군에 동참한 것은 결코 놀랄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수의 룩셈부르크 자원자들이 브뤼셀로 떠났고, 독립군에 가담했습니다. 1830년 10월 4일 벨기에독립군이 네덜란드 군과의 시가전에서 승리한 후, 임시정부를 수립해 벨기에 독립을 선포했습니다. 룩셈부르크의 대표자들의 일부는 벨기에 임시정부 수립을 돕게 되었습니다. 프로이센의 독립수비대에 의해 경호되고 있었던 룩셈부르크의 수도 만이 네덜란드 국왕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유럽열강들에 의해 독립 되었던 네델란드 처럼 벨기에도 유럽열강들의 이해관계 속에 독립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벨기회 의회는 이 결정을 받아들였으나 빌럼1세는 이를 거부하였고, 그 후 8년동안 대공국은 양국의 통치 아래에 놓여져 있었습니다. 룩셈부르크 도시에는 네덜란드의 빌럼공의 입김이 작용하는 동안, 도시 밖은 벨기에의 지휘권 아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결국 빌럼공은 유럽열강의 결정에 따르게 되었고, 1839년 4월 19일에 런던에서 최종조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이때 부터 룩셈부르크는 둘로 나뉘어 지게 되었습니다. 룩셈부르크 대공국은 오랑주-나사우 왕가에게 계속 승계되었고, 벨기에-룩셈부르크는 현재 벨기에의 지방주로 편입되었습니다. 룩셈부르크 대공국의 현재 국경은 1839년의 런던조약 이후로 현재까지 변화 없이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현재 룩셈부르크 국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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