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18일 수요일

룩셈부르크 : 자치권의 강화 (1839-1890)

Nicolas Liez: La ville de Luxembourg, 1870

1839년이 후로 더 이상 네덜란드와의 영토분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또한 대공은 하는 수 없이 분리된 행정부를 승인하였습니다. 네덜란드의 국왕인 빌럼2세(룩셈부르크 대공으로서의 재위기간 1840-1849)는 1841년 대공국을 방문해 "나는 룩셈부르크 대공국이 룩셈부르크 국민에 의해 통치 되기를 원한다" 라고 공표 하였습니다. 1841년 초 부터는 헌법의 보완과 수정도 허용되 었습니다. 서서히 자주적인 모습의 국가가 완성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작 170,000명의 국민을 가진 2,586 제곱킬러미터의 작은 나라가 완벽한 독립을 한다? 

처음에는 대공국은 독일 연방에 속해 있으면서, 네덜란드 왕가와도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서서히 이 들과의 관계를 끊는데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1866년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 으로 독일연방의 해체가 가시화 되었습니다. 프로이센의 확장에 직면하게 되면서, 프랑스는 영토적인 보상을 찾고 있었습니다. 룩셈부르크는 쉬운 희생자처럼 보였습니다. 나폴레옹 3세는 룩셈부르크를 네덜란드로부터 매입하고자 오백만 골드 프랑을 제시하였습니다. 빌럼3세(룩셈부르크 대공으로서의 재위기간 1849-1890)는 이 제안을 받아 들었습니다. 하지만 룩셈부르크 요새를 수비하던 프로이센은 이를 거부했습니다. 해결방안을 찾기위해 유럽강국은 또 다시 런던에 모였습니다. 

1867년 5월 11일 런던 열국회의 에서 룩셈부르크는 열강의 보장하에 영세중립국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독일연방 해체 후에도 여전히 룩셈부르크 내에 주둔하고 있던 프로이센군의 수비대도 요새에서 철수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전쟁에 이어 나폴레옹 3세의 외교적 패배를 명백히 드러낸 것으로, 이를 계기로 프로이센-프랑스 사이의 긴장이 더욱 가중되게 됩니다. 


아돌프 대공

1867년의 위기는 네덜란드 왕이 자국의 국왕과 룩셈부르크의 대공을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열강들의 야욕에 노출되어 있었다는 점에서부터 초래 되었던 것입니다.  1890년 빌럼3세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세 아들이 있었으나 모두사망), 룩셈부르크와 네덜란드의 개인적인 연합(네덜란드 국왕의 대공 겸임)은 끝나게 되었습니다. 

빌럼3세의 딸인 빌레미나가 네덜란드의 여왕으로 재위에 오르지만 (빌럼3세가 유명을 달리 할 무렵 헌법개정이 이루어지고, 이 후 딸도 후계자가 될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당시 미성년자였으므로 그녀의 어머니가 섭정했다.), 룩셈부르크 대공 지위는 나사우-바일부르그가의 아돌프에게 넘겨집니다.  그 결과 룩셈부르크는 1890년부터 나사우-바일부르그라고 불리우는 독자적인 왕가(Nassau-Weilburg)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나사우-바일부르그 왕가는 아돌프, 빌럼4세 마리-아델레이드, 샤를로트, 장 그리고 현재의 대공 앙리 공까지, 6명의 대공을 배출 하였습니다. 


참조 :  History of the Grand duchy of Luxembourg
위키피디아 & [네이버 지식백과] 룩셈부르크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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