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30일 목요일

룩셈부르크에 대한 오해와 진실

Q. 룩셈부르크는 왕이 다스리는 나라이다? 

A. 아닙니다. 19세기의 룩셈부르크 대공국은 군주제처럼 대공작에 의해 통치되는 형태였으나, 오늘날에는 입헌군주제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입헌군주제 체제아래에서는 대공작의 권력이 헌법에 의하여 제한을 받기 때문에, 대공작이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대공작은 룩셈부르크 국민들에게 국가 수장의 상징으로서 존재하며, 실질적으로 나라를 통치하는 역할은 선거를 통해 선출된 총리와 민주주의 의회에게 있습니다.


Q. 룩셈부르크는 네덜란드에서 독립한 나라이다?

A.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나폴레옹 전쟁 이 후, 유럽의 지도는 다시 쓰여지게 되었습니다. 1815년 비엔나 회의에서 네덜란드 연합 왕국이 신생이 결정되면서, 현제의 벨기에 지역과 룩셈부르크 지역은 네덜란드 연합 왕국의 오랑주-나사우 왕가의 빌럼 6세(=새 연합왕국의 빌럼 1세)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는 이 후 룩셈부르크 대공작의 칭호를 부여받게 됩니다. 이로써 룩셈부르크 대공국은 네덜란드 연합왕국과 동군연합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지리학적으로 룩셈부르크 역시 네덜란드 왕국의 한 부분이 될 수 도 있었지만, 비엔나회의에서 공국에서 대공국으로 승격되며, 정치적으로 분리된 독립국의 지위를 부여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서류상으로 네덜란드와 다른나라로 구분되었던 룩셈부르크는 실제로는 네덜란드의 국왕 빌럼1세 에게 다스려 진다는 것에 있어서 별 차이는 없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룩셈부르크 대공국을 마치 그의 왕국의 18번 째 지방주인 것 처럼 통치하였습니다.

룩셈부르크의 대공작-가가 네덜란드 왕가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고, 역사적으로 네덜란드가 룩셈부르크의 근대사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독자적인 독립국의 지위는 계속 유지하고 있었기에, 네덜란드의 영향력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로서의 독립은 맞지만, 이 것은 네덜란드라는 나라에서 분리된 나라라는 의미의 독립은 아니며, 네덜란드 국왕이 룩셈부르크 공작을 겸임하던 것이 끝나면서, 네덜란드-룩셈부르크 연합의 해체가 이루어 진 것으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어떤 외국인이 일제강점기라는 힘든시기를 지낸 우리에게 ' 한국은 일본으로 부터 독립한거 맞잖아~ ' 라고 말한다면, 역사적으로 틀린 말은 아닐지라도, 기분은 나쁘겠죠? 신랑은 '뭐 그정도로 기분 나쁠거 까지는 아니야~' 라고 말하기는 하는데, 그래도 사실관계는 명확하게!)


Q. 세계2차대전당시 침공당하지 않았다? 

A. 아닙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22년 후, 1940년 5월 10일, 룩셈부르크는 다시 독일군의 점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과거의 전례를 반면교사로 삼아, 여대공 샤를로테와 정부는 런던과 캐나다 등지로 망명하여 나치군과 맞서 싸우게 되었습니다. 연합군과의 손 잡은 룩셈부르크는 전쟁 후, 다시 승전국의 하나로서 국제적인 승인을 얻게 되고, 국제사회에서의 기반을 굳건히 할수 있었습니다.

독일과의 합병을 위한 나치 정권의 강렬한 선전 캠페인이 룩셈부르크 사람들에게 강요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것은 국민들의 반감만을 불러올 뿐 이었습니다. 나치군은 1942년 8월 30일 강제징집을 실시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룩셈부르크 곳곳에서 전국적인 시위의 도화선을 지피웁니다. 나치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21명의 시위자를 처형하였습니다. 총 10,211명의 룩셈부르크 국민이 강제징집에 동원되었지만, 그 중 1/3이 넘는 사람들은 나치군복을 입을 것을 거부하고 은신하였습니다. 이러한 반응에 대해, 나치군의 강제 송환, 강제 수용소 와 처형과 관련된 공포의 통치가 촉발되었습니다.

전대미문의 상황 속에서도 국민 대부분은 놀라운 단합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다른 나치 점령 지역에서와 같이 저항 조직이 생겨났고, 그들의 주요 활동 중 하나는 징병제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숨겨주는 것이었습니다. 1944년 9월 10일, 룩셈부르크는 미국에 의해 자유를 되찾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치군은 모젤강을 따라 전투병력을 배치하였고, 1944 년 12 월 역습을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2월 22일 비안덴 지역의 해방, 4월 14일 여대공인 샤를로테의 귀환 그리고 1945 년 5월 8일 독일의 무조건적인 항복을 마지막으로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Q. 식민지 침탈을 통해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A. 이러한 루머는 아마도 룩셈부르크가 네덜란드의 지배하에 놓여있던 시기에 대한 오해와 같은 맥락에 놓여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룩셈부르크는 네덜란드가 식민지 지배 및 교역으로 승승장구 하고 있을 당시,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의 영향을 받고 있었으며, 19세기 초 까지만 하더라도 소규모 수공업중심의 농업국가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실제 룩셈부르크의 공업혁명을 이끌었던 것은 1840년초 룩셈부르크 남부에 매장된 철광석의 발견과 1842년 관세동맹의 가입이었습니다.

<위키피디아 출처> 네덜란드 제국(Dutch Empire)은 17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네덜란드 공화국이 본국과 식민지를 확대해 구축한 식민지 지배 및 교역 체제를 가리킨다. 17세기 초 네덜란드 공화국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여, 동인도에 진출해 포르투갈에서 향료 무역을 빼앗았으며,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도 설립하는 등 점차 식민지를 확대하고 황금 시대를 맞았다. 17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 식민지주의 대국으로 도약하였다. (네덜란드가 차지한 가장 큰 식민지는 지금의 인도네시아로, 본토의 50배나 되는 크기의 식민지를 약 300년간 차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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