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19일 월요일

룩셈부르크 : 정치적 위기 그리고 1919 국민투표



독일군의 후퇴 직 후, 위기는 바로 찾아왔습니다.  좌파세력의 대표는 의회에서 공작가의 퇴위를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전쟁 중에 점령군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과 정치적으로 우파세력을 지지하던 것에 대해 대공을 비난했습니다. 발의는 가까스로 저지되었습니다. 국제적으로도 룩셈부르크 정부는 여대공 마리-아델레이드에 관한 비판에 직면해야했습니다. 프랑스와 벨기에는 룩셈부르크의 독립에 반향의 위험을 지닌 비밀 협상들을 수행 하였습니다. 1919년 1월 9일, 룩셈부르크 자원군은 반란을 일으키고, 공공 안전 위원회는 룩셈부르크가 공화국임을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프랑스 군대의 신속한 개입에 의해 저지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대공 마리-아델레이드 의 위치는 ​​확실히 위태로워지게 되었습니다. 1919년 1월 15일, 마리-아델레이드는 여대공의 지위를 동생인 샤를로테에게 양위하기로  지체없이 결정 하였습니다. 

위기를 완화하기 위해, 룩셈부르크 정부는 두가지의 안건에 관한 국민투표를 실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국민은 국가의 형태(대공국으로 머물 것인지 아니면 공화국으로 나아갈지)와 국가의 경제 방향의 형태(관세 동맹의 탈퇴여부)에 대한 결정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승전국들이 베르사유에 모여 유럽의 지도를 다시 그리려던 때, 윌슨의 민족 자결 원칙에 따라 국민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인상을 주려는 의도가 있었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여대공의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서 국민투표가 실시 되었습니다. 1919년 9월 28일, 첫 보통 선거가 처음으로 실시되고, 투표자의 대다수는 군주제 유지에 찬성(80%) 하였으며, 프랑스와의 경제 연합(73%) 을 지지하였습니다.


양대전사이의 기간

1920 년대의 경제 복구 후, (룩셈부르크는 해를 입지 않았지만) 세계 경제 선언을 촉발하는 위기가 1930 년대에 다시 찾아왔습니다. 불경기로 인한 정리해고는 일이 없으면 본국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이주노동자들에게 특히 많은 영향을 미쳤기에 대공국은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의 실업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경제 위기는 공산당에 어느 정도의 힘을 실어 주게 되었습니다.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광산등지의 노동자들 사이에 인기 얻었지만, 보수원 사이에서 우려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1937 년에 정부는 정치 와 사회 질서를 보호하기 위해서 라는 명분을 앞세워 공산당을 불법화 하려 했습니다.  반대세력의 힘을 무력화 하기 위해 법을 이용해 탄압했던 것입니다. 의회의 찬성에도 불구하고, 유권자의 대부분은 의사표현의 자유를 침해 할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국민 투표에서 공산당의 해체를 거부했습니다. 

국제적으로 룩셈부르크는 여전히 중립을 유지하면서, 제네바에 있는 국제연맹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그 위치를 강화 하였습니다. 그러나 1933 년 독일에서 나치 정권의 창설됨으로써 외부로부터의 위협의 그림자가 다시 한 번 드리워지게 되었습니다.

참조 :  History of the Grand duchy of Luxembou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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