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시밀리안 1세
에스파냐 공주 후아나와 그녀의 아들 카를
당시 합스부르크가의 영토
에스파냐의 실질적인 통치는 카를이 오스트리아는 동생인 페르디난트가 맡아서 해오다가, 카를이 퇴위할 때 에스파냐와 네덜란드의 실질적인 통치가 힘들다고 보고 합스부르크 왕가를 둘로 분리하여, 에스파냐와 신대륙 식민지는 아들 펠리페 2세에게 주고 오스트리아는 페르디난트 1세가 계속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독실한 카톨릭인 펠리페 2세와 종교의 자유를 외치며 기독교를 믿으려는 네덜란드사이의 골은 더욱 더 깊어져 네덜란드 7개주 동맹의 독립군이 결성되고 처절히 싸우다 1568년 네덜란드는 에스파냐에 자주독립선언을 하며 1648년 30년 전쟁(1618-1648년에 걸쳐 30년간 유럽의 온나라가 신.구교로 갈라져 벌인 종교전쟁)의 결과로 네덜란드의 독립이 이루어 질때 까지 오랜 기간 투쟁하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초강대국 에스파냐에 굴복한 남부 열개의 주는 또 다시 에스파냐의 지배를 받게되고(1579년), 북부는 끝까지 저항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구교를 믿는 벨기에와 신교를 믿는 네덜란드로 사실상 오늘날의 국경이 정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펠리페 2세
룩셈부르크는 유럽이라는 체스판 위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에스파냐-합스부르크가와 발루아 부르봉가 사이의 패권싸움에 여러번 휘말렸습니다. 룩셈부르크 도시는 "Gibraltar of the north"-북부의 천혜요새, 북부의 지브롤터 로 불리우며 꾸준히 그 명성을 유지해 왔습니다. 1659년 피레네조약 (Treaty of the Pyrenees: 30년전쟁 중에 시작한 에스파냐와 프랑스와의 전쟁을 끝맺음시킨 조약)을 통해 에스파냐는 룩셈부르크 공국의 남쪽지역(지금의 Thionville 지역)을 프랑스에 양도하였습니다. 1661년 루이 16세 가 프랑스의 왕으로 즉위하고 1684년 룩셈부르크의 요새는 루이 14세의 군대에 둘러 쌓였습니다. 그 후 1697년까지 프랑스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1697년 레이스베이크 조약을 통해 에스파냐는 점령당한 카탈루냐와 룩셈부르크 지역을 복구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1715년 에스파냐의 왕위 계승 전쟁에 의해 남쪽 네덜란드땅은 다시 오스트리아-합스부르그가에게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앞의 두세기와 달리, 18세기는 룩셈부르크에게는 평화로운 시절이었습니다. 카를 6세(재위기간 : 1715-1740), 마리아 테레지아(재위기간 : 1740-1780), 요셉 2세(재위기간 : 1780-1790)의 통치기간은 룩셈부르크 분만 아니라 다른 여러 지역에도 부흥기였습니다. 7개월간의 저항 끝에 1795년 프랑스 혁명군에게 요새를 점령 당하게 되면서, 룩셈부르크는 다시 프랑스로 편입되게 됩니다. 하지만 징병제의 도입, 의무 군 모집의 시스템은 Kleppelkrich (cudgel war)로 알려진 1798년 농민 반란을 발발하게 만들었습니다. 나폴레옹 집권시기, 온건적인 집권 방식은 대중들에게 더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참조: History of the Grand duchy of Luxembou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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