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24일 토요일

룩셈부르크 : 네덜란드 시기


14세기  당시 부르고뉴는 백년전쟁(1337-1453)을 통해 (당시 부르고뉴는 프랑스 지방에 속했지만 프랑스와 함께 싸우지 않고) 네덜란드와 영국편 에서 싸우게 됩니다.  백년전쟁 이 후 부르고뉴지방과 네덜란드는 매우 가까워졌고 부르고뉴의 필립 2세와 네덜란드의 플랑드르 지방의 마르그리트 공주가 1369년 부부가 됨으로써 플랑드르 지방은 부르고뉴 왕가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당시 왕족결혼에서 신부가 가져온 땅은 신랑쪽에게 귀속되었음) 1443년, 부르고뉴의 공작 필립 3세의 침입으로 룩셈부르크는 네덜란드령으로 통합되었습니다. 그리하야  이 시기 지금의 네덜란드, 벨기에 지방 전부가 부르고뉴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됩니다.  

필립 3세의 아들 칼이 아들을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나니 부르고뉴의 왕관은 그의 딸 마리에게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1477년 부르고뉴의 공주이며 왕위 계승자이 마리는 (앙숙인 프랑스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황제 막시밀리안 1세에게 시집을 가면서 네덜란드는 물론 부르고뉴까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막시밀리안 1 세 에게는 아들 필립과 딸 마르그리트가 있었는데 딸 마르그리트는 에스파냐 왕위 계승자인 후안과 결혼했고 아들 필리프는 에스파냐 공주 후아나와 결혼하여 네덜란드에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후안왕자가 결혼 6개월 만에 열병으로 급서하고 마르그리트가 낳은 유복자 또한 얼마 안가 죽어 트라스타마라 왕가의 장녀였던 포르투갈의 왕비 아라곤의 이사벨에게 계승권이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막시밀리안 1세



에스파냐 공주 후아나와 그녀의 아들 카를

1504년 이사벨 여왕이 죽자 왕위는 네덜란드에 살던 후아나 공주에게 넘어갔다가 그녀의 아들 카를에게 전해집니다. 그리하야 카를은 오스트리아의 황제이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1519년)이자 에스파냐 왕(카를로스 1세 :  1516년)이 됩니다. (-_-a; 태어날때부터 만렙찍고 나오다니...) 카를은 당시 서유럽을 이끌었던 왕조들 - 아라곤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의 트라스타마라 왕가, 부르고뉴 공국의 발루아-부르봉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 - 의 상속자로서 그는 중유럽과 서유럽 그리고 남유럽을 넘어 아메리카 대륙과 필리핀 제도의 카스티야 식민지까지 포함한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게 됩니다. 

당시 합스부르크가의 영토

에스파냐의 실질적인 통치는 카를이 오스트리아는 동생인 페르디난트가 맡아서 해오다가,  카를이 퇴위할 때 에스파냐와 네덜란드의 실질적인 통치가 힘들다고 보고 합스부르크 왕가를 둘로 분리하여, 에스파냐와 신대륙 식민지는 아들 펠리페 2세에게 주고 오스트리아는 페르디난트 1세가 계속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독실한 카톨릭인 펠리페 2세와 종교의 자유를 외치며 기독교를 믿으려는 네덜란드사이의 골은 더욱 더 깊어져 네덜란드 7개주 동맹의 독립군이 결성되고 처절히 싸우다 1568년 네덜란드는 에스파냐에 자주독립선언을 하며 1648년 30년 전쟁(1618-1648년에 걸쳐 30년간 유럽의 온나라가 신.구교로 갈라져 벌인 종교전쟁)의 결과로 네덜란드의 독립이 이루어 질때 까지 오랜 기간 투쟁하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초강대국 에스파냐에 굴복한 남부 열개의 주는 또 다시 에스파냐의 지배를 받게되고(1579년), 북부는 끝까지 저항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구교를 믿는 벨기에와 신교를 믿는 네덜란드로 사실상 오늘날의 국경이 정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펠리페 2세


16세기와 17세기 동안 룩셈부르크 공국은 다른 지역주들과 마찬가지로 에스파냐-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룩셈부르크는 유럽이라는 체스판 위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에스파냐-합스부르크가와 발루아 부르봉가 사이의 패권싸움에 여러번 휘말렸습니다. 룩셈부르크 도시는 "Gibraltar of the north"-북부의 천혜요새, 북부의 지브롤터 로 불리우며 꾸준히 그 명성을 유지해 왔습니다. 1659년 피레네조약 (Treaty of the Pyrenees: 30년전쟁 중에 시작한 에스파냐와 프랑스와의 전쟁을 끝맺음시킨 조약)을 통해 에스파냐는 룩셈부르크 공국의 남쪽지역(지금의 Thionville 지역)을 프랑스에 양도하였습니다. 1661년 루이 16세 가 프랑스의 왕으로 즉위하고  1684년 룩셈부르크의 요새는 루이 14세의 군대에 둘러 쌓였습니다. 그 후 1697년까지 프랑스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1697년 레이스베이크 조약을 통해 에스파냐는 점령당한 카탈루냐와 룩셈부르크 지역을 복구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1715년 에스파냐의 왕위 계승 전쟁에 의해 남쪽 네덜란드땅은 다시 오스트리아-합스부르그가에게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앞의 두세기와 달리, 18세기는 룩셈부르크에게는 평화로운 시절이었습니다.  카를 6세(재위기간 : 1715-1740), 마리아 테레지아(재위기간 : 1740-1780), 요셉 2세(재위기간 : 1780-1790)의 통치기간은 룩셈부르크 분만 아니라 다른 여러 지역에도 부흥기였습니다. 7개월간의 저항 끝에 1795년 프랑스 혁명군에게 요새를 점령 당하게 되면서, 룩셈부르크는 다시 프랑스로 편입되게 됩니다. 하지만 징병제의 도입, 의무 군 모집의 시스템은 Kleppelkrich (cudgel war)로 알려진 1798년 농민 반란을 발발하게 만들었습니다. 나폴레옹 집권시기, 온건적인 집권 방식은 대중들에게 더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참조: History of the Grand duchy of Luxembourg
위키피디아 & 먼나라 이웃나라 네덜란드편

2013년 8월 21일 수요일

룩셈부르크 : 신성로마제국 시기

룩셈부르크  대성당의 스테인 글라스 창에 새겨진 지그프리드 백작

14세기 초, 룩셈부르크가()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1308년 하인리히 7세 백작은 독일의 왕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재위기간 1308-1314) 그 후 1312년 (신성로마제국의) 로마황제 칭호를 추가적으로 획득하였습니다.  그의 아들인 존은 보헤미아 왕국(오늘날의 체코 영토부분)의 상속녀와 결혼해 보헤미아 왕의 칭호를 획득하였습니다. 


하인리히 7세 이후 룩셈부르크가에서는 

  • 카를 4세(재위기간 1346-1378)
  • 벤체슬라스(재위기간 1376-1400) 
  • 지기스문트(재위기간 1410-1437) 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직에 올랐습니다. 

1354년, 카를 4세는 룩셈부르크를 백작령에서 공작령으로 승격시켰습니다. 
1364년, 치니(chiny: 현재 룩셈부르크 경계 벨기에 지역)의 백작령의 영토를 획득하면서 룩셈부르크는 영토의 최대확장을 이룩하였습니다. 
1443년, 부르고뉴의 필립공작의 침입으로 룩셈부르크는 네델란드령으로 통합되었습니다. 
이 운명은 이 후 4세기동안의 지리적 & 정치적 통일과도 연결 됩니다. 

참조: History of the Grand duchy of Luxembourg

2013년 8월 11일 일요일

룩셈부르크 : 요새도시






요새도시 

963년 지그프리드 백작이 중세말 부터 "Bock"으로 불리우던 알제트강의 바위 곳을 획득했을 때, 그는 틀림없이 전략적 기준 역시 고려했을 것 입니다. 이 곳는 방어시설을 짓기에 최적의 장소였습니다. 백작은 그 곳에 성을 지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성 주변으로 작은 마을들이 형성되기 시작하고, 약 200년이 지난 후 하나의 도시라고 불리울 만한 여건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2세기 중반에 이르러 (오늘날 "Rue du Fossé" 까지 확장된) 견고한 성벽이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거주인구의 증가로 도시는 14세기 도시 서경으로까지 (오늘날의  Boulevard Royal) 확장되며 새로운 성벽을 구축하게 되었습니다.  도시면적은 5헥타에서 23헥타로 증가했습니다. 중세시대의 많은 도시들처럼 룩셈부르크 역시 하나의 요새도시가 되었습니다. 알제트강과 페트루세 강의 깊은 계곡들이 다방면에서(동쪽,남쪽, 북동쪽) 도시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적절한 보수에 의해 증강된 건축물의 위용과 함께 어마어마한 계곡의 높이까지 더해져 가히 천하무적이었습니다. 서쪽과 북서쪽으로 난, 성 밖으로 오갈 수 있는 길 역시 단단한 성문과 성벽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도시는 1443년 브루고뉴의 필립공작의 돌발적인 공격을 받기 이전까지 한번도 다른 이에게 점령된 적이 없었습니다. 룩셈부르크의 새로운 시대는 1354년 공작령을 부여 받으며 시작되었습니다. 이 후 네델란드령으로 통합되었다가 16-18세기 동안 발로아-부르봉왕가와 합스부르그왕가에 귀속 되었었습니다.

참조: www.lcto.lu/history

2013년 8월 6일 화요일

룩셈부르크 : 중세도시


   



중세도시 


"Lucilinburhuc" 라는 단어는 작은 요새라는 뜻도 있습니다. 이 표현은 아주 긴 시간 동안 도시를 위해 특성화 된 두가지 사실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첫번째로, 지그프리드에 의하여 얻게 된 이 바위 곶은 훌륭한 방어시설과 전략적 요충지로서 의 존재를 드러냈습니다. 룩셈부르크 도시는 1867 년에 해체 될 때까지 약 천 년 동안 요새도시로서의 명성을 지켜 왔습니다

두번째로, 이 도시는 역사상 한번도 거대도시로 존재한 적이 없었습니다. 14 세기의 초에 5,000여명의 시민으로 시작해 18세기 말까지 8,500여명의 시민들이 거주했습니다. 세계 1차 대전 이 후 46,500여명으로 급속히 증가한 이 후, 오늘날에는 82,000여명의 시민들이 살고 있습니다. 지그프리드는 바위 골짜기 위에 진정한 요새를 구축했습니다.  기사들과 군인들이 이 곳에 거주하게 되며, 공예가들과 상인들 역시 골짜기 아래 지역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위쪽 시가지와 아래쪽 시가지의 차이점이 두드러지게 되었습니다. 아랫마을을 둘러싼 돌성벽이 증축된 12세기 중후반 이후에서야 하나의 정식도시로 불리우기 시작했습니다. 

대개 도시의 기원은  종교적 장소, 수도원,  강 의 수로 또는 여러 길의 교차지점 등등 에서 유래합니다.  룩셈부르크 도시는 가파른 지역적 위치와 군사적 이용 등이 그 기원이 되었습니다. 


참조: www.lcto.lu/history

2013년 8월 2일 금요일

룩셈부르크 : 도시의 시작

Siegfried I


룩셈부르크의 이름과 기원은 한 사람으로 부터 시작됩니다.

서기 963년 카롤링거(Carolingian) 왕조의 핏줄인 아르덴의 지그프리드(Siegfried) 백작은 트리어의 St. Maximin 수도원으로 부터 알제트 강이 지나는 암벽 요새 지역을 아르덴의 Feulen 지역의 땅과 교환하고 Bockfelsen에 그의 성을 세웠습니다. 그 당시 소유권에 관한 문서를 보면, 이 작은 성을 Lucilinburhuc 이라고 지칭했습니다. 룩셈부르크의 이름은 (아마도 고대 로마에서 유래했을) 작은 성이라는 뜻의 Lucilinburhuc 이라는 단어에서 기원합니다. 그리하여 룩셈부르크 (Lëtzebuerg) 라는 이름이 역사에 처음으로 등장하기 시작 했습니다. 룩셈부르크는 처음에는 도시와 그 주변을 지칭했지만 점점 그 영역을 넓혀 종국에는 도시와 국가의 이름이 동일하게 불리우게 되었습니다.

참조: www.lcto.lu/h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