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30일 월요일

룩셈부르크 : 국가조직의 강화

우리는 있는 그대로 머물기를 희망한다 


1867년 위기가 찾아 왔을 때, 룩셈부르크 국민들은 빌럼3세에 대한 강력한 항의의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Mir wëlle bleiwe wat mir sinn“ (우리는 있는 그대로 머물기를 희망한다) 라는 슬로건은 룩셈부르크 국민들에게 인기를 얻었습니다.  독립적인 국가를 이룩하는 첫 번째 할 일은 제도적인 틀을 구성하는 것이었습니다. 1848년, 1856년 그리고 1868년 세 번의 연속적인 헌법개정으로 젊은 도시를 위한 기틀을 마련하게 됩니다. 또한 정부, 의회와 대공작 사이의 권력과 그에 따른 책임에 관한 공정한 균형을 유지하는데 중점을 두어 설립되었습니다.

룩셈부르크의 완전한 독립은 1890년 빌럼 3세의 서거 이 후에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민주주의는 남녀 모두에게 참정권이 주어진 1919년이 후에 이루어 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계 1차대전발발 전, 정치적 정당들의 출현으로 룩셈부르크의 정당정치가 시작됩니다. 사회당은 1902-1903년 사이, 자유주의 연합은 1904년에, 우파당은 1914년에 생성되었습니다. 공산당은 사회당으로부터의 분리 이 후 1921년에 설립되었습니다. 1919년 이후 모든 정치적 연립정부는 (1925-1926년과 1974-1979년을 제외하고) 쭉- 우파당에 의해 집권 되고 있습니다우파당은 1945년 이 후, 기독교 사회당 (CSV:Chreschtlech Sozial Vollekspartei)으로 이름을 바꾸고 현재까지도 다수여당으로 집권하고 있습니다. 

룩셈부르크인의 진정한 애국심의 발로는 1839년 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벨기에의 혁명을 지지하던 룩셈부르크인들은 벨기에로 부터의 분리를 아쉬워 했습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룩셈부르크인들은 그들의 나라에서 자유적인 자치권을 가지며 지낼 수 있는 장점들의 진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벨기에 혁명 20년 후인 1859 년최초의 철도청의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애국 노래는 이 후, 룩셈부르크의 진정한 국민가요로 불리우게 되었습니다. 

Kommt hier aus Frankräich, Belgie, Preisen,
Mir wellen iech ons Hémecht weisen,
Frot dir no alle Säiten hin,
Mir welle bleiwe wat mir sin.
In English, this reads:
Come here from France, Belgium, Prussia,
we want to show you our fatherland
ask in all directions,
We want to remain what we are.

하지만 Ons Hèmecht (우리의 조국)이 공식적인 국가로서 승인받으며 1864년 처음으로 공식적인 자리에서 울려 퍼지게 됩니다. 이 후 1895년 정식국가로 제정되었습니다.  Ons Hèmecht 는 미셀 렌츠의 시에 장-안토옌 진넨의 음악이 더해진 룩셈부르크의 국가입니다. 

Ons Hèmecht 듣기

19세기 중반부터 계속 된 룩셈부르크인의 애국심은 독일에 의해 흡수될 위험들이 높아지면서, 반독일 정서의 경향을 띄게 되었습니다. 1815년부터 1866년까지 룩셈부르크는 독일 연방에 가입되어 있었습니다. 독일로부터 거리를 두기 위하여 룩셈부르크는 프랑스에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룩셈부르크는 이중언어, 심지어 삼중언어를 하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어는 일상생활 뿐만 아니라 행정부와 사법부의 공식언어로 채택 되었습니다. 표면적으로 룩셈부르크는 프랑스와 가까워 지는 듯 보였지만, 사실 룩셈부르크는 독일, 프랑스 ,벨기에 어느쪽도 아닌 이 세 나라의 사이에서 중심을 잡으며 독립국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켜나가고 있었습니다.


불어공부 : Chloè magique


현재 나의 불어수준에 딱 맞는 클로이마지크! 

애기들 뉘앙스로 (약간 앵앵거리지만) 눈높이에 맞춰 불어발음을 천천히 정확히 발음해줘서 듣기 편하다. 클로이가 오리씨(Monsieur Canard)와 친구들과 함께 옷장에서 요술 옷을 갈아입고 모험을 떠나는 내용이다. 사실 불어하는 클로이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빠져들게 되는 만화>_< 그림체가 너무 예쁘다. 현실세계에서의 오리씨는 클로이가 들고다니는 헝겊인형일 뿐이지만, 모험 도중에는 말도하고 날아 다니는 오리씨가 된다.  오리씨에게 도움을 받거나하면 Merci, Monsieur Canard! 라고 말하는데, Merci 까지는 고마워 정도 느낌인데 Merci, Monsieur 하고 하면 굉장히 정중하게 들린다. (적어도 내 귀에는;; 그래서 그런가,  독어판에서는 클로이는 조이로, 오리씨는 콱콱이로 나오는데 -_- 콱콱이라는 이름은 왠지 모를 거부감이;;) 그리고 마지막 엔딩은 클로이가 엄마나 아빠에게 모험을 설명해주고 (엄마&아빠는 현실성없지만 이런 허무맹랑한 모험을 다 이해해주며) 클로이가 한 얘기를 공감해주며 끝이 난다. 한국에는 클로이의 요술옷장라는 이름으로 소개되고 있다.



아무리 찾아도 오프닝 텍스트는 찾을 수가 없어서, 듣고 따라 써본 텍스트 (미완성)

Dégisons-nous avec chloe magique

Quelle que si aujourd'hui donc chloe magique

serons-nous des sirènes de b     la mér

des ballerines des filles et super 

pillot d'avion pour voler tout la haut

ou conducteus m      , rigola!

Alors, Dégisons-nous avec chloe magique

Quelle que si aujourd'hui donc chloe magique


Tu vas la fantastique

il y a l'aventure donc chloe magique

2013년 9월 18일 수요일

룩셈부르크 : 자치권의 강화 (1839-1890)

Nicolas Liez: La ville de Luxembourg, 1870

1839년이 후로 더 이상 네덜란드와의 영토분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또한 대공은 하는 수 없이 분리된 행정부를 승인하였습니다. 네덜란드의 국왕인 빌럼2세(룩셈부르크 대공으로서의 재위기간 1840-1849)는 1841년 대공국을 방문해 "나는 룩셈부르크 대공국이 룩셈부르크 국민에 의해 통치 되기를 원한다" 라고 공표 하였습니다. 1841년 초 부터는 헌법의 보완과 수정도 허용되 었습니다. 서서히 자주적인 모습의 국가가 완성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작 170,000명의 국민을 가진 2,586 제곱킬러미터의 작은 나라가 완벽한 독립을 한다? 

처음에는 대공국은 독일 연방에 속해 있으면서, 네덜란드 왕가와도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서서히 이 들과의 관계를 끊는데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1866년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 으로 독일연방의 해체가 가시화 되었습니다. 프로이센의 확장에 직면하게 되면서, 프랑스는 영토적인 보상을 찾고 있었습니다. 룩셈부르크는 쉬운 희생자처럼 보였습니다. 나폴레옹 3세는 룩셈부르크를 네덜란드로부터 매입하고자 오백만 골드 프랑을 제시하였습니다. 빌럼3세(룩셈부르크 대공으로서의 재위기간 1849-1890)는 이 제안을 받아 들었습니다. 하지만 룩셈부르크 요새를 수비하던 프로이센은 이를 거부했습니다. 해결방안을 찾기위해 유럽강국은 또 다시 런던에 모였습니다. 

1867년 5월 11일 런던 열국회의 에서 룩셈부르크는 열강의 보장하에 영세중립국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독일연방 해체 후에도 여전히 룩셈부르크 내에 주둔하고 있던 프로이센군의 수비대도 요새에서 철수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전쟁에 이어 나폴레옹 3세의 외교적 패배를 명백히 드러낸 것으로, 이를 계기로 프로이센-프랑스 사이의 긴장이 더욱 가중되게 됩니다. 


아돌프 대공

1867년의 위기는 네덜란드 왕이 자국의 국왕과 룩셈부르크의 대공을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열강들의 야욕에 노출되어 있었다는 점에서부터 초래 되었던 것입니다.  1890년 빌럼3세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세 아들이 있었으나 모두사망), 룩셈부르크와 네덜란드의 개인적인 연합(네덜란드 국왕의 대공 겸임)은 끝나게 되었습니다. 

빌럼3세의 딸인 빌레미나가 네덜란드의 여왕으로 재위에 오르지만 (빌럼3세가 유명을 달리 할 무렵 헌법개정이 이루어지고, 이 후 딸도 후계자가 될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당시 미성년자였으므로 그녀의 어머니가 섭정했다.), 룩셈부르크 대공 지위는 나사우-바일부르그가의 아돌프에게 넘겨집니다.  그 결과 룩셈부르크는 1890년부터 나사우-바일부르그라고 불리우는 독자적인 왕가(Nassau-Weilburg)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나사우-바일부르그 왕가는 아돌프, 빌럼4세 마리-아델레이드, 샤를로트, 장 그리고 현재의 대공 앙리 공까지, 6명의 대공을 배출 하였습니다. 


참조 :  History of the Grand duchy of Luxembourg
위키피디아 & [네이버 지식백과] 룩셈부르크문제

2013년 9월 8일 일요일

룩셈부르크 : 비엔나회의 이 후, 현재의 국경을 구축하기까지 (1815-1839)


Congress of Vienna, 1815

1815년 나폴레옹 전쟁 이 후, 유럽의 지도는 다시 쓰여지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룩셈부르크 역시 영향을 받게 됩니다.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비엔나 회의에서는 네델란드 왕국을 독립시키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네덜란드 연합 왕국의 오랑주-나사우 왕가의 빌럼 6세는 나사우 백작령을 되찾는 대신 나사우 지역을 프로이센에게 넘기고 (엄마가 프로이센 국왕의 딸이었으므로 프로이센은 그의 외가였음),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와 리에주 주교령을 흡수하여 네덜란드 연합왕국을 구성하는 것으로 합의 하였습니다.  빌럼6세는 새 네덜란드 연합왕국의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오랑주-나사우의 빌럼 6세=새 연합왕국의 빌럼 1세)

지리학적으로 룩셈부르크 역시 네덜란드 왕국의 한 부분이 될 수 도 있었지만, 공국에서 대공국으로 승격되며 정치적으로 분리된 독립국의 지위를 부여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배권은 네덜란드의 국왕인 오랑주-나사우의 빌럼1세에 할당 되어 룩셈부르크는 네덜란드와 함께 오랑주-나사우 왕가의 깃발 아래 다스려지게 된 것 입니다. 빌럼1세는 이후 룩셈부르크 대공의 칭호를 부여받게 됩니다.  이로써 룩셈부르크 대공국은 네덜란드 연합왕국과 동군연합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사실 오랑주-나사우는 지금의 독일 베스트팔렌 지방의 왕조로, 1815년 나사우 지방이 프로이센에게 흡수 되면서, 룩셈부르크 대공국을 일종의 보상의 형식으로써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네덜란드 연합 왕국과 달리(오라네공 빌럼1세가 16세기 네덜란드 초대세습총독) 오랑주-나사우 왕가와는 전혀 관계 없던 룩셈부르크 대공국의 영토를 오랑주-나사우 왕가가 비엔나회의를 통해 얻게 되었던 것 입니다. 

룩셈부르크 국경 변천사 

1815년 서류상으로 룩셈부르크는 네덜란드와 다른나라로 구분되었지만, 실제로는 네덜란드의 국왕 빌럼1세 에게 다스려 진다는 것에 있어서 별 차이는 없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룩셈부르크 대공국을 마치 그의 왕국의 18번 째 지방주인 것 처럼 통치하였습니다. 네덜란드 기본법은 룩셈부르크에서도 적용되었고, 룩셈부르크의 대표자들은 네덜란드의 기관에서 일해야 했으며, 학교에서는 네덜란드어를 가르쳤습니다. 룩셈부르크 국민들이 이 것에 크게 반발하지 않는 동안, 네덜란드 정권은 경제부분과 특히 국가재정정치부분에 있어 룩셈부르크 국민들의 불만을 가중시켰습니다. 때문에 1830년 벨기에 지역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을 때,  룩셈부르크 국민들이 벨기에 독립군에 동참한 것은 결코 놀랄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수의 룩셈부르크 자원자들이 브뤼셀로 떠났고, 독립군에 가담했습니다. 1830년 10월 4일 벨기에독립군이 네덜란드 군과의 시가전에서 승리한 후, 임시정부를 수립해 벨기에 독립을 선포했습니다. 룩셈부르크의 대표자들의 일부는 벨기에 임시정부 수립을 돕게 되었습니다. 프로이센의 독립수비대에 의해 경호되고 있었던 룩셈부르크의 수도 만이 네덜란드 국왕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유럽열강들에 의해 독립 되었던 네델란드 처럼 벨기에도 유럽열강들의 이해관계 속에 독립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벨기회 의회는 이 결정을 받아들였으나 빌럼1세는 이를 거부하였고, 그 후 8년동안 대공국은 양국의 통치 아래에 놓여져 있었습니다. 룩셈부르크 도시에는 네덜란드의 빌럼공의 입김이 작용하는 동안, 도시 밖은 벨기에의 지휘권 아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결국 빌럼공은 유럽열강의 결정에 따르게 되었고, 1839년 4월 19일에 런던에서 최종조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이때 부터 룩셈부르크는 둘로 나뉘어 지게 되었습니다. 룩셈부르크 대공국은 오랑주-나사우 왕가에게 계속 승계되었고, 벨기에-룩셈부르크는 현재 벨기에의 지방주로 편입되었습니다. 룩셈부르크 대공국의 현재 국경은 1839년의 런던조약 이후로 현재까지 변화 없이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현재 룩셈부르크 국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