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30일 금요일

룩셈부르크의 새총리의 성은 무엇인가?


5월 5일, 우연히 독일의 슈퍼 인기 퀴스쇼 "Wer wird Millionär" 를 시청하고 있었는데, 32,000유로 문제에서 띠로링~ ~ ~~

Q: 쟝클로드 융커의 뒤를 이어서 취임한 41세의 룩셈부르크 새총리의 이름은 자비에(Xavier)...?
4지선다의 답:     A: Schnorré              B: Bettel              C: Almosyus             D:Trinckgeld

핸드폰 만지작거리며 심드렁하게 보고 있던 우리는 갑자기 눈 번쩍 +_+ 손 바빠짐 ㅋㅋㅋ 티비에 핸드폰 대고 인증샷 찍고 ㅋㅋㅋㅋ 와츠앱의 친구들과 바로 공유 ㅋㅋㅋ 아악~~~ 워쩌다 이런문제가 ㅋㅋㅋ 이렇게 쉬울수가! ㅋㅋㅋㅋㅋ 그런데 티비의 심각한 저 참가자의 얼굴을 보시라 ㅋㅋㅋㅋ 하긴 32,000유로가 걸린문제인데 당연 심각해야지! 근데 정말로 모르는 얼굴 ㅋㅋㅋㅋㅋ 아아악!! 나 알아, 나 알아!!! 나 막 티비 앞에서 발 동동 구르고 ㅋㅋㅋ 결국 우리의 참가자는 지인에게 30초 전화 찬스를 쓰시게 된다 ㅋㅋㅋ 아 이게 전화찬스 쓸 문제냐고 지금 ㅋㅋㅋㅋ MC인 야우흐가 전화 받은 지인에게 "룩셈부르크에 대해 좀 아십니까? " 라고 물었더니 "어... 최근에 지도에서는 찾아본적이 있죠(그만큼 작다는 소리)" 라면서 드립 날려주시고 ㅋㅋㅋㅋ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ㅋㅋㅋ 나중에 문제를 들은 지인도 갈팡질팡 ㅋㅋㅋㅋ 역시 그도 모르는 거였어!!! 아무튼 지인이 D번 어쩌고 드립해가지고 멘붕 온 참가자는 누가봐도 낚시인게 뻔한 D번(Trinkgeld : 식당에서 주는 팁) 에 파닥파닥 낚여주시면서 문제를 틀리고, 단돈 500유로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ㅋㅋㅋㅋㅋㅋ 내 주변의 반응들은 "A가 맞지 않아? 더 불어틱하고 잘 어울릴거 같은데?" 라던가 혹은 "자비에는 게이인거로만 유명해 아무도 그의 성따위는 신경쓰지 않는다고" 라던가 ㅋㅋㅋㅋㅋㅋ

아무튼 그뒤로 자비에는 Trinckgeld라는 제2의 성을 얻게 되고 ㅋㅋㅋㅋ다음날 신문에 "우리의 새총리 자비에 트링겔트"로 기사가 나면서 ㅋㅋㅋㅋ 이 이야기는 룩셈부르크 사람들에게게 재미있는 가쉽으로 회자 되었다 ㅋㅋㅋㅋ 아래의 내용은 후일 퀴즈쇼 참가자인 패트릭과 총리 자비에의 대화 ㅋㅋㅋㅋ



자비에 : 안녕, 우린 정말 배꼽빠지게 웃었어요 하지만 그것이 32,000유로의 값어치를 못한 것은 유감입니다. 언제 룩셈부르크 올 일이 있으면 연락주세요. 새총리가 ,-)

패트릭: 고마워요 베텔씨. 저 개인의 비극만이 아닌 국제적인 반향을 가지고 오니, 오히려 마음이 진정이 됩니다. 모든 룩셈부르크 국민들(총리포함)이 저로 인해 웃으셨다면, 그건 아마도 32,000유로 보다 더한 가치일 겁니다. 그리고 초대는 그저 해본 말은 아니겠지요? ;-D 쾰른에서 패트릭이




그리고 그들은 정말로 만났다고 한다 ㅋㅋㅋㅋ ㅠ0ㅠ 아 왠만한 개그보다 더 재미있어 ㅋㅋㅋㅋㅋㅋ


벤젤워크 : Wenzel Walk



Welzel Walk < 1000년 도시역사의 여정 >

 "벤젤워크 Wenzel Walk" 가이드를 통해 룩셈부르크의 천 년 도시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실 수 있습니다. 유럽위원회에 의해 "뛰어난 문화적 여정: outstanding cultural itinerary" 으로 극찬받은 "벤젤워크 Wenzel Walk"는 룩셈부르크의 가장 오래된 구역들을 지나며 역사적으로나, 건축적으로나,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건물들과 풍경들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벤젤워크의 이름은  Wenzel Wall 이 건립 될 당시의 룩셈부르크의 공작이었던 벤첼슬라스 2세(재위기간 :1383-1419)의 이름에서 유래 했습니다. 여러분이 걷게 될 이 산책로에서 벤젤 담 거리를 걸어 보 실 수 있습니다.

복카즈마테와 룩셈부르크 도시의 요새는 세기를 걸쳐 존재해 왔지만, 관광을 목적으로 광범위한 도시 발굴 및 복원사업이 하기 시작하기 이 전인, 1990년대 까지는 그다지 주목받는 관광지는 아니었습니다.  1994 년 구시가지의 역사적 중심구역과 좋은 상태를 지니고 있는 요새도시의 잔향들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선정 되었습니다. 룩셈부르크의 특이한 점 중 하나는 이 작은 공간에 대조되는 여러 건축스타일이 혼합되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혼합양식은 외세 통치의 계속된 교류의 영향아래, 지난 5세기에 걸쳐 끊임없이 발달해 왔습니다.

벤젤 워크 순환 산책로 곳곳에는 정보 표지판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 커다란 정보 표지판은 길가에 세워져 있으며, 주요 명소들과 룩셈부르크 도시의 역사에 관한 중요한 세부사항을 알려줍니다. 특히 벤젤워크와 함께 과거 요새도시의 지리적 경관과 자연과의 조화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1.복 곶- 복 카즈마테 ( Bock Promontary - Bock Casmates)

벤젤워크 첫번째 산책로는 룩셈부르크 도시의 발상지인 복 곶에서 부터 시작합니다.  서기 963년 카롤링거 왕조의 핏줄인 아르덴의 지그프리드(Siegfried) 백작은 트리어의 St. Maximin 수도원으로 부터 알제트 강이 지나는 암벽 요새 지역을 아르덴의지역의 땅과 교환하고 그 곳에 그의 작은 성을 세웠습니다. 룩셈부르크의 이름은 (아마도 고대 로마에서 유래했을) 작은 성이라는 뜻을 지닌 Lucilinburhuc 이라는 이 단어에서 기원합니다. 그리하여 룩셈부르크(Lëtzebuerg) 라는 이름이 역사에 처음으로 등장하기 시작 했습니다. 

지그프리드는 바위 골짜기 위에 진정한 요새를 구축했습니다. 기사들과 군인들이 이 곳에 거주하게 되며, 공예가들과 상인들 역시 골짜기 아래 지역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위쪽 시가지와 아래쪽 시가지의 차이점이 두드러지게 되었습니다. 아랫마을을 둘러싼 돌성벽이 증축된 12세기 중후반 이 후에서야 하나의 정식도시로 불리우기 시작했습니다. 룩셈부르크는 처음에는 도시와 그 주변을 지칭했지만 점점 그 영역을 넓혀 종국에는 도시와 국가의 이름이 동일하게 불리우게 되었습니다.

지그프리드에 의하여 얻게 된 이 바위 곶은 훌륭한 방어시설과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했습니다. 룩셈부르크 도시는 1867 년에 해체 될 때까지 약 천 년 동안 요새도시로서의 명성을 지켜 왔습니다.

곶의 위에서 우리는 그룬트와 클라우젠 및 파렌탈을 지나는 알제트강의 웅장한 파노라마 광경을 관람 하실수 있습니다. 바위곶의 아래쪽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긴 카즈마테를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고고학적으로도 의미가 깊으며, 이 전의 방어시설의 일부였던 지하갤러리는 3월 부터 10월 사이에 관람이 가능합니다. 

2.성의 다리 (Castle Bridge)

이 전에는 목조 도개교였던 것을 1735년에 붉은 사암 사용해 증축하면 더욱 견고해졌습니다. d이 다리의는 도심지와 외부를 연결해주는 통로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1992-93년에 완전히 복구되었습니다.


3.절벽가의 도로 (Corniche)

산책길은  "Corniche"(Chemin de la Corniche) 라고 불리우는 절벽가의 도로를 따라 계속 됩니다. 17 세기에 스페인에 의해 세워지고 , 후에 Vauban 보방에 의해 강화 된, 이 방어벽은 산책자들에게 그룬트와 Rham 고원에 둘러쌓인 알제트 강의 계곡 주변의 숨이 멎을 듯한 경치를 제공합니다. 산책길을 따라 보이는 고풍스러운 테라스를 가진 상점과 레스토랑들 그리고 눈에 띄는 몇몇 집들 "Maison de Cassal” 은 17-19세기 귀족들이 살던 거주지 였습니다. 


4. 그룬트의 문 (Grand Gate) & 5. 스티어션 (Stierchen)

아래쪽으로 조금 더 계속 내려가면 1632년에 스페인에 의해 세워진 커다란 성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성문은  그룬트베르그의 두번째 문 (second Grundberg Gate) 혹은 네 개의 그룬트 문 (4  Grund Gate)으로 불리웁니다. 왼쪽으로 돌아 구불구불한 골짜기의 아래쪽 을 향하면 “Stierchen”라고 불리우는 작은 인도교(보행자 전용)에 도달 합니다. 



6. 벤젤 담 (Wenzel Wall)

룩셈부르크 도시를 에워싸고 있는 성벽들 중 일정부분은 계곡 주변에서 사는 거주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 되었습니다. 특히 이러한 성벽의 부분을 벤젤 담(Wenzel Wall)이라고 부릅니다. 벤젤 담은 도시방어성벽의 테두리 안에서   고지대에 위치한 시내와 Rham 고원 사이를 연결하고 있습니다. 길이는 875m, 성벽은 37개의 타워와 15개의 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7. 해자(Moat) :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밖을 둘러 파서 못으로 만든 곳

벤첼 벽의 앞에 해자는 1992-93년에 고고학자들 에 의해 발견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세 목조 다리의 기초부분이 매우 잘 유지 되어있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또한, 두 개의 외부 해자 벽중 하나는 중세 때 만들어진 것이고, 다른 하나는 스페인 점령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 해자벽들은 차후에 복원 되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벤첼 담이 지어질 당시에 이루어진 다양한 건설단계들을 명확하게 설명해 줄 수 있는, 주목할 만한 발견들 입니다. 


8. 로버트 크립스 홀 (Robert Krieps hall)

감시를 위해 벽에 구멍들이 뚤려있는 성벽을 건너면, 여전히 벤젤 담의 일부로 남아있는 '로버트 크립스 홀' 에 도달하게 됩니다.

9. 크루델스푸어트(Krudelspuert)

비스듬히 쳐진 창문 아래로 크루델스푸어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존재 의 첫 번째 기준 은 1395 년으로 부터 시작하며, 17 세기까지 그 룬트 와 클라우젠 의 도시 지역을 연결했습니다.

10 노이뮌스터 수도원(Neumünster Abbey)

로버트 크립스 홀은 복잡한 노이 뮌스터 수도원의 건물중 한 부분입니다. 노이 뮌스터 수도원이 첫번째로 파괴 된 후,  베네딕트 회 수도사는 1547년 세인트 존 병원을 건립하고, 몇 가지 새로운 건물을 더 지었습니다. 1796 년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수도원은 감옥으로 사용 되었습니다. 1815년에는 그 사용이 변경되어 1867년까지 군 병원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867 년 런던 조약 체결의 결과로, 룩셈부르크는 중립국이 되었습니다. 노이 뮌스터 건물은 정부의 소유가 되었으며  1869년에서 1984년까지는 남성 재소자 감옥으로 사용 되었습니다. 광범위한 혁신 이후, “Centre Culturel de Rencontre Abbaye de Neumünster” 라는 부서에서 유지되며, 모든 건물들은 현재 사회 및 문화 행사의 주요 장소로 사용 되고 있습니다.


11.트리어의 두번째 문 (Second Gate of Trier)

트리어의 두번째 문은 1590년에 지어졌습니다. 이 길을 따라 우리는  람(Rham)고원으로 향하게 됩니다.


12.야콥타워(Jacob Tower)

야콥타워는 Dinselpuert 또는 트리어의 옛문(old gate of Trier) 이라고도 불립니다. 이 커다란 문은 벤젤 담에 속하는 건물로, 바로 앞에 도개교와 해자도 가지고 있었었습니다. 탑의 꼭대기 에서는 대포의 포대를 사용할 수 도 있었습니다. "Dinselpuert는 15 세기에 건설되었습니다



13.람고원(Rham plateau)

벤젤 담의 확장건설을 통해 람고원에서 부분적으로 거주하던 사람들은 룩셈부르크 구시가지로의 연결이 더욱 용이하게 되었습니다. 프랑스가 지배하던 17세기 말, 보방은 4개의 병영생활관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19 세기 말 이후, 이 시설들은 사회기관으로 변모하였습니다. 고원에 서면  the Holy Ghost Plateau  요새의 모습과 인상적인 전망들을 보실수 있습니다.


14. Biesserpuert

"Biesserpuert"의 건립시기는 15 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07 년이 오래된 도시 게이트의 앞 부분은 '위생 및 도시양식의 이유'로 부분 철거 되었다가 1980 년대에 다시 복원 되었습니다.


15. Maierchen

이 보초 길을 걷고 있으면 알제트 강을 건너 페트뤼세Pétrusse 밸리 근처에 까지 다다르게 됩니다.  그 끝에서 세인트 울릭 거리에 들어서게 되는데, 그것은 이곳에 지금은 없어진, 룩셈부르크 도시의 가장 오래된 교구교회 세인트 울릭 (St. Ulric)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6. 그룬트 자물쇠 (Grund Lock)

그룬트 자물쇠는  군사 전략의 이유로 1731년에 지어졌습니다. 적의 공격이 있을 경우, 알제트와 페트루스 강의 물이 멈추게 되므로, 다른 군대를 공격하기 위한 별도의 장애물로 사용할수도 있었습니다.


17.신성 고스트 고원 (Holy Ghost Plateau & Cité Judiciare)

방둑을 따라 도보 후 건너 올라오면서 왼쪽으로 돌면 지하통로를 통해 엘레베이터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곳은 예전 13세기의 St. Clare 수녀원이 있었던 자리 입니다. 1684 년 프랑스 원수 보방은 이 곳에 주민 피신용 성채와 두 개의 병영(1967년까지 사용됨)을 건설하였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오늘날에 새로운 "Cité Judiciare"로 통합되어, 룩셈부르크의 법무부로 사용되고 있다.

이 곳을 끝으로 벤젤워크의 여정은 끝이 나게 됩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통해 돌아볼 수 있는 이 산책로를 통하여 과거의 룩셈부르크를 만나 즐거운 여정이 되셨기를 소망합니다.

번역문헌 :  Wenzel Circular Walk 가이드 브로셔


룩셈부르크 관광안내소 벤젤워크 관광투어 안내

일시 : 매주 수요일 & 토요일 오후 3시

시작 : 룩셈부르크시 기욤 광장 내 관광 안내소

소요 시간 : 2.5 시간 (5km)

사용 언어 :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요금 : 성인 10 €, 학생 및 노인 8 €, 어린이 5 €

티켓이나 투어 설명 전단지는 룩셈부르크시 관광 안내소에서 구하실 수 있습니다.



*아래의 링크를 타고 가시면 가이드브로셔를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http://www.lcto.lu/en/download-center?media=108

summer in the city Luxembourg 2014



뜨거운 한 여름의 열기를 중세도시의 숨을 간직한 룩셈부르크에서 느껴보세요. 룩셈부르크 시티의 아름광장과 기욤광장에서 개최되는 오픈에어 콘서트(무료)로 여러분들을 초대합니다. 룩셈부르크의 구시가지에서 즐길 수 있는 환상적인 음악들과 파티 분위기를 마음껏 만끽해 보세요. 클래식부터 재즈 락 등의 다양한 장르의 콘서트가 이 여름, 여러분들을 기다립니다. 또한 이번 여름 룩셈부르크를 관광하실 예정이시라면, 대공가의 공작궁전을 관람할 수 있는 기회와 룩셈부르크 도시아래에 존재하는 지하벙커인 페트루스 카즈마텐 관람, 쇼버포어 축제등의 볼 거리들도 놓치지 마세요!



*2014 summer in the city 스케쥴 안내*

2014.06.21
opening act summer in the city and fete de la musique

2014.06.22
eve of the luxembourg national holiday

2014.06.23
luxembourg national holiday
룩셈부르크의 연례국가행사인 이 날은 룩셈부르크 대공작의 공식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서 6 월 23 일에 열립니다. 이 날짜가 현재 룩셈부르크의 대공작의 실제 생일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원래는 대공의 생일에 하던 것을, 1961년에 추운겨울에 축제를 할 수 없다는 기후적인 이유를 들어 현재의 날짜로 고정시킴) 룩셈부르크 시내에서는 국경일을 기념하며 자정을 기해 성대한 불꽃놀이가 펼쳐집니다. 이 후 늦은새벽까지 사람들은 그룬트지역에서 열리는 파티를 방문하여 밤새도록 음악과 술을 즐기며 국경일을 경축합니다.

2014.06.26-29
porsche parade europe

2014.07.05
music festival world meyouzik

2014.07.06
musikfestival rock um knuedler

2014. 07.
music festival omni

2014. 07.15. - 09.07
visit of the palace of the grand dukes
여름기간에 한해서 룩셈부르크 대공가의 공작궁을 둘러보실 수 있습니다. 가이드는 독일어,불어,네델란드어,영어,룩셈부르크 어가 제공이 됩니다. 요금은 어른 7유로, 아이 3.5유로이고, 관람시간은 45분입니다. 티켓은 룩셈부르크 시티 투어리스트 오피스에서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매주 수요일은 휴무 입니다.

-시간대별 가이드언어안내-
Monday, Tuesday, Thursday, Friday, Sunday: 
11.00h: Luxembourgish 14.00h: German 14.30h: French 15.00h: Dutch
15.30h: French 16.00h: English 16.30h: German 17.00h: English
Saturday:
10.30h: Luxembourgish 11.00h: German 14.00h: German 14.30h: French
15.00h: Dutch 15.30h: French 16.00h: English 16.30h: German 17.00h: English


2014.07.19
Liszt homage

2014.07.19.
blues`n jazz rallye

2014.08.09-10
streeta(rt)nimation

2014.08.22 - 09.14
schueberfouer 
룩셈부르크의 최대 축제.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쇼버포어 축제를 보러오세요. 매해 2만명 이상의 관람객들이 방문하는 쇼버포어 행사의 기원은 1340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룩셈부르크의 전통향토음식인 구운생선"gebaakene fesch" 과 감자전"gromperkichelcher"이나 또는 달콤한 맛을 자랑하는 "schappnougat" 와플을 드셔 보실 것을 추천합니다.

2014.10.11
museum night

참고링크
http://www.lcto.lu/en/download-center?media=147

2014년 5월 19일 월요일

룩셈부르크 : 정치적 위기 그리고 1919 국민투표



독일군의 후퇴 직 후, 위기는 바로 찾아왔습니다.  좌파세력의 대표는 의회에서 공작가의 퇴위를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전쟁 중에 점령군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과 정치적으로 우파세력을 지지하던 것에 대해 대공을 비난했습니다. 발의는 가까스로 저지되었습니다. 국제적으로도 룩셈부르크 정부는 여대공 마리-아델레이드에 관한 비판에 직면해야했습니다. 프랑스와 벨기에는 룩셈부르크의 독립에 반향의 위험을 지닌 비밀 협상들을 수행 하였습니다. 1919년 1월 9일, 룩셈부르크 자원군은 반란을 일으키고, 공공 안전 위원회는 룩셈부르크가 공화국임을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프랑스 군대의 신속한 개입에 의해 저지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대공 마리-아델레이드 의 위치는 ​​확실히 위태로워지게 되었습니다. 1919년 1월 15일, 마리-아델레이드는 여대공의 지위를 동생인 샤를로테에게 양위하기로  지체없이 결정 하였습니다. 

위기를 완화하기 위해, 룩셈부르크 정부는 두가지의 안건에 관한 국민투표를 실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국민은 국가의 형태(대공국으로 머물 것인지 아니면 공화국으로 나아갈지)와 국가의 경제 방향의 형태(관세 동맹의 탈퇴여부)에 대한 결정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승전국들이 베르사유에 모여 유럽의 지도를 다시 그리려던 때, 윌슨의 민족 자결 원칙에 따라 국민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인상을 주려는 의도가 있었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여대공의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서 국민투표가 실시 되었습니다. 1919년 9월 28일, 첫 보통 선거가 처음으로 실시되고, 투표자의 대다수는 군주제 유지에 찬성(80%) 하였으며, 프랑스와의 경제 연합(73%) 을 지지하였습니다.


양대전사이의 기간

1920 년대의 경제 복구 후, (룩셈부르크는 해를 입지 않았지만) 세계 경제 선언을 촉발하는 위기가 1930 년대에 다시 찾아왔습니다. 불경기로 인한 정리해고는 일이 없으면 본국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이주노동자들에게 특히 많은 영향을 미쳤기에 대공국은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의 실업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경제 위기는 공산당에 어느 정도의 힘을 실어 주게 되었습니다.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광산등지의 노동자들 사이에 인기 얻었지만, 보수원 사이에서 우려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1937 년에 정부는 정치 와 사회 질서를 보호하기 위해서 라는 명분을 앞세워 공산당을 불법화 하려 했습니다.  반대세력의 힘을 무력화 하기 위해 법을 이용해 탄압했던 것입니다. 의회의 찬성에도 불구하고, 유권자의 대부분은 의사표현의 자유를 침해 할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국민 투표에서 공산당의 해체를 거부했습니다. 

국제적으로 룩셈부르크는 여전히 중립을 유지하면서, 제네바에 있는 국제연맹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그 위치를 강화 하였습니다. 그러나 1933 년 독일에서 나치 정권의 창설됨으로써 외부로부터의 위협의 그림자가 다시 한 번 드리워지게 되었습니다.

참조 :  History of the Grand duchy of Luxembourg

2014년 3월 28일 금요일

2014.3 Notre Dame de Paris



2006년 노트르담 드 파리 오리지널 내한 이후 8년만에(!) 다시 만난 이 공연! 세종문화회관 3층 발코니에서 정말 뛰어 내려가고 싶었던 그 무대, 그래서 그 뒤로는 공연은 왠만하면 좋은자리에서 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그 때 정말 밥을 몇끼 굶더라도 1층석에서 보았어야 했다 ㅠㅠ) 정말 씨디를 백만번도 넘게 들어서 불어는 몰라도 멜로디는 다 꿰고 있는데, 이번에 온 팀은 영어버전 이란다 ㅠㅠ 오 마이 갓! 처음엔 안보러 가려고 했었다. 다른 무대는 몰라도 이 무대는 정말 못 알아들어도 절대 불어로 봐야하는 무대라, 불어가 아니면 안되!라고 생각하는 나였기에. 때문에 불어버전이랑 자꾸 비교하게 되서 공연에 집중하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정말 주교 캐릭터만 몰입 할 수 있었고, 다른 캐릭은 오리지널이 더 나았다는 생각이 ㅠㅠ) 하지만 클라스는 영원하다고, 다시 만난 공연은 역시나 감동적이었다. 하지만 오리지널 작품 캐릭터들의 연기가 워낙 뛰어나다보니(그랭구아르와 클로팽은 정말 극 중 이야기와는 거의 별 상관없이 정말 노래하는 배우의 매력으로만 존재감을 드러내야 한다. 그러고보면 그랭구아르역의 브루노가 이 역할을 맡은건 정말 대박이었다) 정말 8년 전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확실히 나이를 먹었구나 하고 느끼는게, 캐릭터들에 대해 이 전과는 또 다른 시각에서 보게 되고, 생각하게 되어서 이다. 

캐릭터들의 계층은 정말 명확하게 나뉘어져 있다. 프롤로(부주교)>피뷔스(군인)>...(넘사벽)...그랭구아르(음유시인),클로팽(집시)>에스메랄다(집시),콰지모도(종지기)정도로 나눌 수 있겠다. 전부터도 좋았지만 가장 인상깊었던 캐릭터는 역시 부주교! 이 양반의 에스메랄다에 대한 (사랑을 가장한) 집착은 정말 상상 초월이다. 가장 상위 계층이기에 할 수 있는 일도 아주 많다. 밑에 다른 캐릭터도 마음대로 부리고(콰지모도), 회유하고(피뷔스), 마음만 먹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인데, 단지 얻을 수 없는 것은 여인의 마음! 그것도 자기보다 하위계급의! 그러니까 아주 미치고 팔짝 뛰는 거지. 거기에 원래부터 여자를 탐하면 안되는 신부라는 정말 완벽하게 멋진 캐릭터 설정까지!! 이 설정 부터가 이 둘은 절대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이다. 거기다 겉으로는 신부라는 아주 신성하고 그럴듯한 탈을 쓰고, 뒤로는 모든 추잡스러운 일(납치,상해,모함)을 꾸미고 실행 하는것도 이 캐릭터가 가진 선과 악의 대비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그리고 상식적으로도 새파랗게 젊고 이쁜 여자가 늙다리 신부를 사랑할리도 만무하다. 나이든 남자의 젊은 여자에 대한 욕망. 이 역시도 당연히 노.노.네버. 당근 안되는 거다. 남자는 늙어가는 것을 부정하고 싶고, 나는 아직 (그정도로) 늙지 않았어! 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이 역시도 안타까운 현실 부정일 뿐. 부주교의 사랑은 전반적으로 거의 금기에 가깝다. 그런데도 이 금기를 깨고,넘고,가지고 싶은게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원래 부터 이룰 수 없는 것을 왠만한 것은 뭐든 이뤄왔던 사람이 가지려고 하니까, 결국엔 널 가질 수 없다면, (내가 가진 권력으로) 차라리 널 없애버리겠어 (그래서 너라는 사람이 없었던 이전처럼 평온했던 일상으로 돌아갈꺼야!) 라는 극단적 선택으로 치닫는 거다.


Tu vas me détruire -<직역: 너는 나를 파멸로 이끄네> 

주교의 고뇌가 가장 잘 나타나있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곡


부주교의 아래 계급인 피뷔스(난 원래부터 이캐릭이 참 맘에 안들었어)는 한마디로 동급계급의 (이미 잡아놓은 물고기인)약혼녀와 하위계급의 (절세미인의) 에스메랄다 사이에서 누구를 선택할까 갈등하다가 윗 계급의 약혼녀에게 돌아간 케이스이다. 하위 계급으로 내려가더라도 에스메랄다를 선택함으로서 헌신적인 사랑을 보여주는 동화같은 선택...... 따위는 개나 주라 그래! 난 내가 가진 것을 포기할 순 없어! 라는 아주아주 현실적인 캐릭터. 

극 중 거의 유일한 여자 캐릭터인 에스메랄다. 남자복이라고는 지지리도 없는 년. 절세미인 캐릭임에도 불구하고 인생에 남자라곤 달랑 셋(그래 뭐 그랭구아르 까지 넷, 하지만 별 차이는 없다)인데, 늙고 집착 심한 남자(주교), 가진 것도 없고 장애 있는 남자(콰지모도), 젊고 잘생기고 나보다 상위계층인데 임자 있는 남자(피뷔스)가 그녀가 가진 선택권의 전부다. 그 중 제일 낫다 싶은 피비스를 선택해서 인생역전을 꿈꾸었으나, 젊은 놈에게는 팽당하고, 늙은 남자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은 죄로 죽게 된다. 현실적인 에스메랄다였더라면 그랭구아르를 선택해서 조용히 삶을 살다 가는게 젤 무난 했을 거라고 생각되지만, 그럴려면 얼굴이라도 좀 덜 예쁘고, 그래서 포부라도 좀 적게 가졌어야 하는데, 이 여자가 팜므파탈이니까 이게 또 안되는 거라. 그냥 아무개한테 시집가기에는 본인의 미모가 너무 출중하거든...... 하여간 에스메랄다가 예쁘지만 않았어도 모두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인데, 역시 예쁘다고 다 좋은 것만은 아닌가 보다. 극 중에서 에스메랄다의 캐릭터는 사회적(집시)&계층적(여자) 약자의 충분조건을 모두 가지고 있다. 거의 유일무이한 여자 캐릭터인데  (물론 피뷔스 약혼자가 있지만, 같은 여자라고 돕고 이해해주고 그런거 없다. 얘 입장에서는 지 약혼자 홀린 나쁜 년인데다가 본인보다도 하위계층이니 피비스한테 자기한테 돌아오려면, 그 년을 매달고 오라는 말도 서슴치 않는다. 이렇게 말하는 여자 이름이 반전돋게 플뢰르-드-리스(백합꽃)이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처럼, 남자가 바람 피우는는 걸 목격한 상황에서 여자는 정말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콰지모도와 동급이 아닐것 같지만, 사실은 여자라 (장애인일지라도 남자인 콰지모도와)동급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런 에스메랄다를 이해해주고 온전히 사랑을 주는 것도 콰지모도 뿐이다. 

콰지모도는 장애를 가지고 있기에 본인이 최하위계층임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상위계층이 시키는 일은 의심도 않고 뭐든 한다. 게다가 물 한 잔 가져다 준 거에 '어? 이거 그린라이트인가?' 하고 금사빠가 되는 그야말로 연애경험전무의 캐릭터. 모태솔로이니 한번 불붙은 짝사랑은 식을줄을 모른다. 아니 게다가 왜 남자들은 이놈이나 저놈이나 할 거 없이 죄다 이쁜여자만을 찾는지... 이게 모든 문제의 시발점이라고!! 뭐 아무튼 콰지모도는 가진 게 없으니 잃을 것도 없다. 고로 에스메랄다에게 주는 사랑도 한이 없다. 순수한데 정말 너무 순수해서 탈이다. 그래서 콰지모도의 짝사랑이 지고지순하긴하지만 조금은 답답해 보이기도 한다. 에스메랄다가 죽고 '그녀가 나를 원하지 않아서 죽였다' 라는 말에 격분해 주인으로 하늘처럼 섬기던 주교를 죽이는 콰지모도. 콰지모도는 모든 짝사랑이 그렇듯 에스메랄다에게 끊임없는 사랑을 주고, 속으로는 그녀도 본인을 사랑해 주기를 원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사랑을 꼭 받아내리라! 이루리라! 이런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녀와 정상적인 사랑을 나누기에는 자기가 너무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떄문이다. 그래서 그냥 그녀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만으로도, 그녀와 친구처럼 지내는 것만으로도 그의 짝사랑은 충족되고 있었다. 그런데 주교는 같은 이유로 콰지모도와는 정반대의 선택을 해버리니, 정말 빡칠만도 하지. 최상위 계층의 주교를 최하위 계층의 인물인 콰지모도가 죽이게 되는 것도 참 재미있다. 이렇게 악인들은 꼭 '설마 네 까짓놈이!' 하며 방심하다가 죽는다. 에스메랄다가 죽고나서야 비로소 콰지모도는 에스메랄다에 대한 자신의 갈망을 마음껏 털어놓는다. 왜냐면 그녀는 이미 고인이니까. 이제 계층같은 것은 신경 쓸 필요 없게 되었으니까. 최하위 계층의 남자의 사랑이란 참 이렇게도 서럽다. ㅠㅠ 그래서 더 불쌍한 콰지모도 ㅠㅠ. 

이렇게 극 중 인물 대다수는 죽고, 어떠한 사랑도 이루어 지지 않는 채로(피비스가 약혼녀에게 돌아가긴 하지만 한번 바람피고 돌아온 남자와의 사랑이 뭐 얼마나 대단하다고, 플뢰르는 아마 죽을때까지 피뷔스를 갈구며 살테지, 그 둘은 이제 그냥 신뢰없는 사랑으로 묶여서 그냥저냥 사는거다) 비극으로 끝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라고 하는 해피엔딩 보다 훨씬 더 여운이 깊다. 이런게 인생인가 싶기도 하고, 또 몇 백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건 어디서나 변함이 없구나 싶기도 하고.



Belle를 부르는 세 주인공. 콰지모도는 이 뮤지컬 이전에도 굉장히 유명하던 가수인데(근데 목소리 때문에 노래를 이런 식으로 밖에 못 부른다고 ㅋㅋ) 현실에선 저렇게 키도 크고 얼굴도 훤칠 ㅠㅠ 부주교 프롤로 역을 하신 분 역시 극에선 분장을 그지같이 그렇지, 현실에서는 저렇게 중년남자의 매력을 폴폴 풍기시는데 ㅠㅠ, 극에서는 정말 짜증나던 피뷔스도 현실에선 이렇게 라틴남자 매력줄줄 흘리면서 겁나 잘생겨보이는데! 극 중의 에스메랄다가 이걸 보았다면 아마 속 터져 죽었을 듯 ㅋㅋ

2014년 3월 4일 화요일

룩셈부르크 : 1차 세계대전 시기


1867 년, 런던회의에서 열강들의 보장하에 영세중립국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제사회에서 중립국으로서의 룩셈부르크의 위치는 불안정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각 유럽의 위기상황 마다 룩셈부르크의 문제는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고,  이웃국가들의 숨겨진 합병 욕망을 고조시켰습니다. 1914 년, 룩셈부르크는 세계 1차대전에 휘말렸습니다. 1914년 8월 2일, 독일의 군대는 대공국을 침략하여, 중립국을 침략할 수 없다는 조약을 위반했습니다. 룩셈부르크 당국은 독일의 침공에 항의하였으나, 독일군대는 침공 후, 룩셈부르크에 주둔하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국가의 기관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습니다. 나라의 주권과 주 정부는 자리에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전쟁 이 후, 연합군은 룩셈부르크의 중립정책을 비판하였습니다.

전쟁 중, 주민들이 대면하게 되는 가장 큰 문제는 식량의 공급이었습니다. 전쟁의 상태는 국가 생산의 부족한 부분에 대한 소모품의 수입을 불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정부는 배급량을 정하고, 물가상승을 통제하기 위한 최고가를 도입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 암시장이 성행하였고 도시와 지방 사이의 높은 긴장감을 가져왔습니다. 물자의 결핍 , 가격 상승 과 구매력 의 손실은 사회 갈등을 촉발시켰습니다. 이러한 불만들은 노동자로 하여금 노동 조합을 구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1916년 9월, 철강 산업 의 처음 두 노조가 탄생했습니다. 한 노조는 Esch-Sur-Alzette 의 광물유역 근처에서 , 나머지 노조는 도시에서 출범하였습니다. 1917 년 철강노조파업이 일어났고, 이는 독일 군대에 의해 제압되었습니다.

룩셈부르크와의 합병은 독일의 승전기념목표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그 사이에 독일당국은 특정 제제를 부과했습니다.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점령기에 발생했던 어려움은 수많은 룩셈부르크 국민이 나치 정권의 피해자로 죽어간 1940년부터 1944년 사이의 어려움과는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2 차 세계 대전 동안의 탄압은 국민 연대의 놀라운 단결을 불러왔습니다. 이는 점령군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으로 이어졌습니다. 반면 1차 세계대전동안의 룩셈부르크는 심각한 내부 갈등을 겪었던 나라로 비추어졌었습니다. 

2014년 1월 15일 수요일

룩셈부르크 : 경제성장

1839년 이후 신생국가인 룩셈부르크에 가장 도전적인 일은 실행가능한 경제 계발 계획을 진행 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룩셈부르크는 시대에 뒤떨어진 농업국가 였습니다. 이 곳은 제혁, 섬유, 도기, 제지, 양조 등과 같은 소규모 수공업 중심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소수였었고 규모도 작았습니다. 룩셈부르크는 지리적 고립과 경제적 상황으로부터 힘든시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 작은 나라에게 경제발전의 의미는 나라의 개방을 의미했습니다. 1842년 룩셈부르크 대공국은 (19세기 독일의) 관세동맹에 가입합니다. 라인강 이변을 넘나드는 큰 시장과 연결될 수 있게 해주던 이 연합은 룩셈부르크에게 많은 이점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독일은 중공업을 개발하는데 필요한 자본과 노동을 제공 했습니다. 하지만 다가 올 경제무역을 위하여, (도시 간 의) 도로노선의 연결이 요구 되었습니다. 철도(라인들)의 건설은 -룩셈부르크와 티응빌(Thionville) 사이의 첫 연결은 1859년에 개시되었다- 대공국과 바깥세계를 연결했을 뿐만 아니라 국내 지역 또한 긴밀히 연결하게 되었습니다.  





관세동맹의 회원자격 그리고 철도 네트워크는 공업화 사회로 진입하는 유리한 조건들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실제) 룩셈부르크의 공업혁명을 이끌었던 것은 1840년초 룩셈부르크 남부에 매장된 철광석의 발견이었습니다. 1870년부터 계속 대규모의 철강작업들이 일어났습니다. 미네뜨(minette: 흑운모와 정장석(正長石)을 주성분으로 하는 황반암(煌斑岩)(lamprophyre)의 일종.)라고 불리우는, 인을 많이 함유한 룩셈부르크의 광석들을 처음에는 단점으로 여겨졌으나, 1879 년 영국의 시드니 토마스가 발견한 제강공법으로 룩셈부르크의 인이 함유된 선철은 강철로 변환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 개시 전 날, 룩셈부르크는 세계에서 가장 큰  철강 생산자들 여섯 나라 중 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1911년 뒤들랑주, 아이히, 부르바흐 등 세 개의 철강회사가 합병하여 룩셈부르크의 대표 철강업체인 아르베드(ARBED : Aciéries Réunies de Burbach-Eich-Dudelange )가 탄생하였습니다.

철강산업은 1973년 석유파동으로 인해 타격을 받고 쇠퇴하기 시작하기 전까지 룩셈부르크 주요한 경제산업으로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룩셈부르크의 노동인구의 25%의 고용과 거의 60%에 육박하는 국가산업총생산량을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철강산업은 룩셈부르크 국가재산의 주요 근원으로서, 산업시대동안 룩셈부르크 사람들이 영유하던 높은 수준의 삶의 근간이 되었던 산업이었습니다.


Avenue de la Liberté거리에 있는 ARBED본사건물. 
높은 유지&보수 비용 때문에, 현재는 근교의 현대적건물로 이전되었다.

산업화는 나라의 인구와 사회구조를 변화시켰습니다. 나라북부의 외즐리의 농부들은 광산이나 공장에서 일하려고 그들의 땅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지역노동시장의 수요는 이들만으로는 충족되지 않았습니다. 1890년부터 지금까지다른나라로의 해외이민은 사실상 멈추었고 룩셈부르크는 이민국이 되었습니다. 외국인들은 여러물결은 타고 도착했습니다. 처음엔 독일인들이, 그다음엔 이탈리아인들이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1960년대부터 계속 포르투갈 사람들이 룩셈부르크로 이민을 오고 있습니다. 1910년 이민자는 이미 전체인구의 15.3%를 넘어섰으며, 오늘날, 이민자는 거의 42%에 육박하게 되었습니다. 노동 뿐만아니라, 자본과 시장에 대한 높은 해외 의존도는 룩셈부르크 경제의 영구적인 특성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룩셈부르크는 세계2차대전 직 후, 독일과의 관세동맹을 철회하고, 1921년 7월 25일 벨기에와의 경제및 통화연합( BLEU : Belgium-Luxembourg Economic Union)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이 조약은 50년동안 지속되는 것이었으나, 이 후 두 번 더 연장되었습니다. 아직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경제연합은 두 나라 사이를 오랫동안 하나로 묶어 놓았습니다. 벨기에 프랑이 보통 화폐로 통용되었기는 하지만 ,룩셈부르크는 룩셈부르크 통화를 발행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참고 : 네이버 백과사전, 위키피디아
History of the Grand duchy of Luxembourg,Wort.lu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