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12일 목요일

룩셈부르크 2013 총선비교

출처: www.mierscher-schoulen.net

총선결과는 기독사회당(CSV)이 38.3%의 득표로 총 60석중 23석을 가져가면서 총선의 승리자 인것 처럼 보인다 하지만 최다의석임에도 불구하고 과반의석 확보에 실패하면서 반쪽의 승리로 머물고 만다. 노동사회당(LSAP)과 민주당(DP)은 21.7%의 득표로 각각 13석씩을 획득했으며, 녹색당(Greng)은 10%의 득표로 6석을 얻었다. ADR과 좌파당(Lenk) 은 각각  5% 와 3.3% 의 득표로 3석, 2석을 획득했다. 이번 총선에서 실질적으로 승리한(?) 당은 민주당과 좌파당이다. 2009년의 총선과 비교해 전반적으로 CSV와 LSAP의 표심은 줄어든 반면, DP와 Lenk는 더 많은 표를 받았다. 그 외의 다른 당의 변화는 그리 큰편은 아니었다. (+-2% 정도) 해적(Piraten)당 의 선전(+2.9%)도 돋보였으나, 의석을 얻는데는 실패했다. 


출처 : 위키피디아

지역별 획득 의석은 북부 9석, 동부 7석, 중부 21석, 남부 23석 획득. 이로써 룩셈부르크 사람들은 주로 중부지역과 남부지역에 모여사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중부지역과 남부지역의 표심이 중요하다. 총 투표율이 어느정도인지 보려고 했는데 어디에서도 전체투표율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역별 투표율을 봤을 때, 적어도 80%이상의 투표율을 보이는 것은 확실하다.

장-클로드 융커는 남부지역에서 55968표를 얻었으며, 자비에르 베텔은 중부지역에서 32064표를, 중부지역에서 에티네 슈나이더는 19682표를 얻었다. 융커는 말할 필요도 없이 CSV내에서 최다표 획득 (두번째와 거의 두배차이) 베텔은 DP내에서 최다표를 획득했으나, LSAP의 최다 득표자는 남부지방에서 38257표를 얻은 진 아셀본 (현 외무부장관)이다 (슈나이더는 당 내에서 7번째 최다득표, 왜냐면 LSAP의 표 밭이 남부지방이라 6번째까지 죄다 남부지방에서 나옴)

총선날 울 남편은 당연히 추가근무를 했는데, 새벽 늦게 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느 한 선거구의 개표에 문제가 생겨서 늦어진 거라고 했는데, 알고보니 그 선거구에서 투표를 도와주던 사람들이 자기네들이 그 곳에서 투표한 거를 생각 못하고, 개표하니까 표가 더 나와서 다시 세어보고 다시 세어보고 하다가 나중에서야 자기네들 표를 안 셌다는걸 알았다고 ㅋㅋㅋ 울 남편은 그것때문에 빨리 퇴근 할 수 있었는데, 퇴근도 못하고 있었다고 매우 억울해 했다 ㅋㅋㅋ 다음선거에는 이런 일 없기를 ㅋㅋㅋ

http://www.elections.public.lu/fr/elections-legislatives/2013/resultats/index.html

2013년 12월 11일 수요일

룩셈부르크 연정출범

지난 10월 20일은 룩셈부르크의 총선이었다. 그 전에 바로 독일총선이 있었는데, 독일총선의 결과는 사실상 FDP의 몰락과  CDU의 승리로 끝났다. FDP의 지지자들이 왜 FDP에 등을 돌렸는지가 흥미로 왔는데 그 이유는 바로 내세운 공약을 지키지 않아서라고. 지지자의 80%가 그 이유로 FDP의 지지를 철회 한 것이다. 

<연합뉴스> 룩셈부르크 소수3당 연정 출범…19년만에 정권교체

룩셈부르크의 정치사는 정당정치가 시작되면서 부터 100년 넘게 거의 기독사회당CSV이 다수 여당으로 장기집권했다고 보면 된다. 전 총리였던 장 클로드 융커는 CSV 소속으로 1995년 총리직을 수락한 이 후, 쭉 연임해 오다가 이번에 19년만에 총리직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19년 동안!! 무려 19년 동안 총리직에 있었다니!! 오죽하면 CSV의 슬로건은 "우리에게는 융커가 있다!" 이거였다 ㅋㅋ 한나라의 총리로 19년 연임을 한걸 깰 사람이 있을까 모르겠다. 독일의 헬무트 콜이 16년이었고, 앙겔라 메르켈이 이번 총선에서 CDU의 승리로 3선연임이 확정적인 가운데 2017년까지 일하면 12년(마거릿 대처가 11년이었으니까, 여성총리로선 앙겔라가 현재 1위다) 총리직 수행이라는 걸 보면 19년은 정말 긴긴 기간이었던 거다.

국정원의 불법도청 비리가 드러나고, 여기에 직접적인 연루사실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총리가 국정원의 수장인지라 융커가 정보기관의 비리를 제대로 감독하지 못했기에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 오자 융커는 총리직에서 내려와 총선을 다시 치루게 된다. 진짜 미안해서 책임지러 내려온것 같지는 않고(언제 정치인들이 뭘 책임지는사람들이던가), 조기사퇴하는 식으로 부드럽게 마무리하면서,  다음번 총선을 노린 것이 아닌가싶다. 다음 총선에 또 승리하면 어차피 또 융커가 연임하는 거니까.  영예롭게 내려오진 못했지만 그래도 융커의 지지층은 이 나라에서 매우 넓고 단단한 편이기에. (우리 남편도 융커찍을수 있었다면 찍었을거라고, 그런데 지역구가 달라서 투표용지에 이름이 없어서 못찍었다고 ㅋㅋ ) 그래서 이번 총선이 어찌 될지 더 궁금하기도 하였는데, 총 60석의 의석중에 CSV가 23석 으로 과반확보에 실패하면서, 결국 룩셈부르크 국민들 역시 국가비리에 대해 투표로서 철퇴를 가한 셈이다. 그게 아무리 날고 긴다하는 정치인인 융커였다 하더라도 국민의 선택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융커를 동정하실 필요는 없다. 융커는 지금 주변에서 국제EU기구로 가서 일하라고 하는 조언을 너무 많이 받고 계시단다)

이건 여담인데, 어느날인가 한번은 남편하고 정치얘기하다가 들은 이야기인데, 그 때 교통부장관 아들이 음주운전이었던가 하는 경미한 사고로 경찰에 연행됐는데, 그걸 교통부장관이 대놓고 직접 압력 줬다기 보단 "얘 내 아들이야. 나 누군지 알지?" 약간 이런 뉘앙스 정도?로 경찰에 압력을 줬나봄 (그래 고슴도치도 지 새끼는 이쁘다는데, 지 빽으로 좀 빼주고 싶었겠지 이해는 해) 근데 이걸 기자가 알고서는 신랄하게 까대기 시작함. 장관은 그런적 없다고 발뺌하고 넘어가고, 우리남편은 그 기사를 읽고 이렇게 공권력을 사사로이 휘둘러도 되냐면서 목청에 핏대를 높이는데, 난 사실 너무 부러웠다 ㅠㅠ 한국엔 29만원으로 평생먹고 사시는분도 있는데, 지금 이걸 공권력 남용이라고 저렇게 열받아 할 수 있다니... 물론 원칙적으로는 그래, 해서는 안되는 일이지, 맞는 말인데... 한국 정치의 스케일을 알면 너는 아마 뒤로 나자빠질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요런 경미한 사건(?)에 분노하는 네가 참 부럽다고!!


Letzte Aktualisierung: 21/10/2013 00:02
CSV (23)LENK (2)ADR (3)GRENG (6)LSAP (13)DP (13)
CSV23
DP13
LSAP13
Déi Gréng6
ADR3
Déi Lénk2
KPL0
Piratepartei0
PID0



2009년 총선 후 연립정부에 참여했던 노동사회당(LSAP)과 야당인 민주당(DP)은 각각 13석씩을 획득했으며 녹색당은 6석을 얻었다. 결과가 나오고 나서 처음에 3당 연합체제가 이야기 되었을 때는, 반신반의 했던 것 같다. 말이 쉽지 3당 연정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그런데 3당 연정 외에는 또 다시 CSV와의 연정이 될 수 밖에 없는데, 또 그럴 수는 없으니 어려워도 3당 연정으로 갈 수 밖에 없는 일이기도 했다.

룩셈부르크 군주인 앙리 대공(大公)이 민주당 당수인 자비에르 베텔(Xavier Bettel)에게 정부 구성을 위임하면서, 베텔이 차기 총리가 되었다. 베텔은 2011년부터 룩셈부르크 시의 시장직을 맡고 있었다. 새정부의 출범은 지난 12월 4일부터였다. 부총리는 에티네 슈나이더로 LSDP당의 당수이다. 연합뉴스에서 이사람도 게이라고 소개해서 (베텔은 원래 이동네에서 게이로 유명하다)  "에티네도 게이야?" 라고 물어봤더니 남편은 금시초문이라고 ㅋㅋ 아침에 둘이 인터넷 검색하고 생난리 ㅋㅋ 남편은 아니라고 방방 뛰었는데, 위키피디아에 게이라고 뙇! ㅋㅋ 인터뷰 링크 까지 뙇! ㅋㅋ 

Luxembourg to become first country to have gay prime minister and gay deputy PM

울남편은 어디 듣도 보도 못한 영국발 뉴스 하나로 슈나이더가 게이라는게 증명되는건 아니라면서 믿고 싶지 않은 눈치 ㅋㅋ 아놔 ㅋㅋ 노동사회당에 직접 전화라도 해봐야 하나? 게이인지 아닌지 확인차? ㅋㅋ 총리도 게이고 부총리도 게이인 이 쿨한 동네 ㅋㅋ 어쩔꺼야 ㅋㅋ 엊그제 크리스마트 마켓 갔을 때, 남편 왈 "어 저기 베텔 지나간다!" 나는 베텔 볼려고 두리번 거리는데 남편 또 쿨하게 한마디 "이미 지나감" =-= 우이씽 그럴거면 말을 말던가 ㅋㅋ 총리가 막 돌아다녀도 아무도 몰리지 않는 쿨한 동네 ㅋㅋㅋ  기사를 읽어보니 내년에는 룩셈부르크에서의 동성결혼도 허용이 될 듯하다.

2013년 12월 10일 화요일

2013 한국 방문

- 부산 김해공항에 내렸다. 경전철을 탔는데 안내방송이 "이번 내리실 역은 덕두, 덕두 입니다. the next stop is 독~뚜~~ 독~뚜~~~"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발음 왜 이래 ㅋㅋㅋㅋㅋㅋ 하필 역이름도 덕두 ㅋㅋㅋㅋㅋㅋㅋㅋ 잊혀지질 않네 ㅋㅋㅋㅋㅋ

- 체류기간이 짦아서 스케쥴은 늘 full 이었다. 서점에 갈 시간도 없어놔서 지하철에서 만델라 평전을 구입했는데,(그런데 유럽 돌아오는 날 만델라 타계. 지인이 너 이 책 알고 샀냐며;;) 그러고 보니 대한민국 지하철은 정말 대단한 곳이었다. 책 뿐만 아니라 화장품, 의류, 음식 등등 별별 제품을 다 만날 수 있는 곳이 대한민국의 지하철이었다. (하기사 유동인구만 따져도 지하철 노점은 정말 대단한 상권이다.) 뿐만 아니라 지하철에서만 만날 수 있는 품목들도 종종 있다. 예를들면 선물로 늘 인기가 좋은 지퍼넥타이. 3개에 만원하는 이 상품은 지하철 노점 말고는 살 수 있는 곳이 없어서, 나는 이걸 사러 구지 가지 않아도 될 역인 종로 3가까지 지하철로 돌아 가야만 했다. 

-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옷은 대부분 패딩. 대개는 패딩. 많이들 패딩. 패딩패딩패딩 뿐이었다. 집에 온 다음날, 엄마가 날 데리고 백화점에 가서 사준 옷도 패딩이었다. 패딩을 많이 입기 때문에 패딩을 많이 파는 것인지, 모든 브랜드가 패딩상품을 내놓기 때문에 사람들이 패딩만 입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외국사람들은 동양인의 얼굴구분을 잘 못하는데, 입는 옷까지 획일적이니 우린 아마 더 구분하기 힘들어졌겠지? ㅋㅋ 한국에서 유행 이라는게 얼마나 중요한 건지 다시금 확인했던 순간. 물론 나도 그 패딩을 지금 잘 입고 있지만 ㅋㅋ

- 명동에서 길거리 좌판에서 맘에 드는 귀걸이를 골라 아주머니에게 건냈는데 아주머니가 만천원을 부른다. 내가 좀 많이 고르긴 했지만 만원은 안 넘어 갈 것 갔았는데 한국말로 다시 물으니 팔천원이란다. 아주머니한테 왜 그랬냐고 물어보니 외국인인줄 알았다며 (아니 이게 말이야 방구야 =_=)내년에 우리 식구들 이 부근에 떨궈놓을려 했는데 바가지 안쓰게 교육 잘 시켜야 겠네...

- 강남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로 북적인다. 하지만 12월인데도 거리에서는 단 한 번도 캐롤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연말연시 분위기도 나지 않았다. 경기가 그만큼 안 좋다는 이야기 일까? 강남은 사람들로 꽉 차있는 모습이었지만, 사람들의 얼굴 속에서 연말연시의 기쁨이나 여유 같은 단어는 읽을 수 없었다. 자선냄비의 종소리는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로 공허하게 메아리 쳤다. 그 종소리가 너무나도 삭막하게 들려 듣는 내가 짜증이 다 날 정도 였다. 서울의 크리스마스는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2013년 11월 11일 월요일

Margaux Avril - Papaoutai


Margaux Avril - Papaoutai 

Papaoutai  가 이런느낌으로도 불릴 수 있었구나. 91년생이라니 +_+ 젊구나

2013년 10월 23일 수요일

Stromae - ''tous les mêmes''


http://stromae.net <-스트로마에 씨디 전곡듣기

Stromae 의 이번 앨범 씨디를 사서 들어 보니 앨범의 노래들이 전체적으로 다 좋다. (씨디를 샀는데도 가사가 들어있지 않아서 슬펐다 ㅡ.ㅜ 난 가사가 필요하다고! 할 수 없이 인터넷으로 찾아 볼 수 밖에 ㅡ.ㅜ) Papaoutai는 물론이고, Formidable 노래가사의  Tu étais formidable, j'étais fort minable 언어유희도 참 기발하다. (물론 노래도 좋다) 그 외에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노래는 sommeil 인데 tu n'as pas sommeil 라는 가사가 반복되는 이 노래를 듣고나면  몸을 움직여 당장 무엇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tous les mêmes 는 노래 보다 뮤비를 더 잘 만들어 놓은 것 같다. Stromae 의 좋게 말하면 자유분방함이고 심하게는 똘기(?)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처음엔 '한쪽 눈 왜 저래?' 이렇게 생각했는데, 오른쪽은 여장 왼쪽은 남장이었다.  여장한 쪽 얼굴이 일반 여성보다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건 함정 ㅋㅋ 뮤비자체는 굉장히 저 예산인데 어쩜 저런 똘끼 충만한 느낌을 잘 살려서 찍었을까 ㅋㅋ 볼 때 마다 즐거워 지는 뮤비 ㅋㅋ 심하게 내 스타일 이시다 ㅋㅋ 그런데 12월에 있는 룩셈부르크 콘서트는 벌써 매진이다 (왜! 왜!! 왜!!! 가고싶다고!!!ㅠㅠ) 

Stromae - Papaoutai


Alors On Dance로 유명한 Stromae의 새 앨범 타이틀 Papaoutai

정확한 문법으로는 Papaoù t'es 지만 불리는데로 받아적어서 제목이 저 모양 (누가 알려주지 않고 그냥 들어서만은 난 절대로 몰랐을거야 ㅠㅠ 무슨 뜻인지) 밝은 노래톤과는 달리 가사는 자세히 읽어보면 꽤 가슴아프다. 뮤비를 보면 더 배가 되는듯 ㅠㅠ 아빠를 기다리다 그리워하다 분노하다 마지막엔 아빠처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소파에 앉는 엔딩은 정말 (이렇게해서라도 아빠와 닮아지고 싶은 마음 ㅠㅠ) c'est genial! 이라고 밖에는 표현이 안된다. Stromae 본인 역시 친아빠를 세 번 밖에 못봤다는 사실을 알고나니 즐겁던 노래가 이젠 더 애절해 ㅠㅠ 

[Couplet 1]
Dites-moi d'où il vient
Enfin je saurais où je vais
Maman dit que lorsqu'on cherche bien
On finit toujours par trouver
Elle dit qu'il n'est jamais très loin
Qu'il part très souvent travailler
Maman dit "travailler c'est bien"
Bien mieux qu'être mal accompagné
Pas vrai ?
Où est ton papa ?
Dis-moi où est ton papa ?
Sans même devoir lui parler
Il sait ce qu'il ne va pas
Ah sacré papa
Dis-moi où es-tu caché ?
Ça doit, faire au moins mille fois que j'ai
Compté mes doigts

[Refrain] (x2)
Où t'es, papa où t'es ?
Où t'es, papa où t'es ?
Où t'es, papa où t'es ?
Où, t'es où, t'es où, papa où t'es ?

[Couplet 2]
Quoi, qu'on y croit ou pas
Y aura bien un jour où on y croira plus
Un jour ou l'autre on sera tous papa
Et d'un jour à l'autre on aura disparu
Serons-nous détestables ?
Serons-nous admirables ?
Des géniteurs ou des génies ?
Dites-nous qui donne naissance aux irresponsables ?


Ah dites-nous qui, tient,
Tout le monde sait comment on fait les bébés
Mais personne sait comment on fait des papas
Monsieur Je-sais-tout en aurait hérité, c'est ça
Faut l'sucer d'son pouce ou quoi ?
Dites-nous où c'est caché, ça doit
Faire au moins mille fois qu'on a, bouffé nos doigts

[Refrain]

[Outro] (X2)
Où est ton papa ?
Dis-moi où est ton papa ?
Sans même devoir lui parler
Il sait ce qui ne va pas
Ah sacré papa
Dis-moi où es-tu caché ?
Ça doit, faire au moins mille fois que j'ai
Compté mes doigts

[Refrain]




Papaoutai Übersetzung:
Sag mir, von wo er kommt,
Damit ich weiß, wo ich hin will
Mama sagt, wenn man gut sucht,
Dass man dann immer findet

Sie sagt, er ist nie weit weg
Er geht jeden Tag arbeiten
Mama sagt, arbeiten ist gut
Besser als keine Arbeit haben
Stimmt doch?

Wo ist dein Papa?
Sag mir, wo ist dein Papa?
Ohne, dass ich jemals mit ihm geredet habe,
Weiß er, was er falsch gemacht hat
Verdammt Papa,
Sag mir, wo du dich versteckst!
Ich hab wohl schon tausend Mal,
Auf Zehn gezählt

Wo bist du? Papa, wo bist du?
Wo bist du? Papa, wo bist du?
Wo bist du? Papa, wo bist du?
Wo bist du, wo? Bist wo? Papa, wo bist du?

Ob wir es glauben oder nicht,
Es wird einen Tag geben, wir glauben es kaum noch,
Ein Tag oder ein anderer, an dem wir zusammen sein werden, Papa
Und ein Tag oder ein anderer, an dem wir wieder auseinander gehen werden

Werden wir gehasst werden?
Werden wir geliebt werden?
Vorfahren oder Genies,
Sagt uns,
Wer gibt einem Verantwortungslosen Leben?

Ah sagt uns, wer das macht?
Jeder weiß,
Wie Babies gemacht werden
Aber niemand weiß,
Wie Väter gemacht werden
Mister Alleswisser,
Es liegt uns im Blut, das ist es.

Soll ich es jetzt aus meinem Daumen lutschen oder was?
Sag mir, wo ich die Antwort finde
Ich hab mindestens schon Tausend mal
Meine Finger trocken gelutscht
Hey!

Wo bist du? Papa, wo bist du?
Wo bist du? Papa, wo bist du?
Wo bist du? Papa, wo bist du?
Wo bist du, bist du, wo, Papa, bist du?

Wo bist du, Papa?
Sag mir, wo bist du Papa?
Ohne, dass ich jemals mit ihm geredet habe,
Weiß er, was er falsch gemacht hat
Verdammt Papa,
Sag mir, wo du dich versteckst!
Ich hab wohl schon tausend Mal,
Auf Zehn gezählt
He!

Sag mir, wo bist du Papa?
Ohne, dass ich jemals mit ihm geredet habe,
Weiß er, was er falsch gemacht hat
Verdammt Papa,
Sag mir, wo du dich versteckst!
Ich hab wohl schon tausend Mal,
Auf Zehn gezählt
He!

Wo bist du? Papa, wo bist du?
Wo bist du? Papa, wo bist du?
Wo bist du? Papa, wo bist du?
Wo bist du, bist du, wo, Papa, bist du?


[ Papaoutai Lyrics an http://www.songtextemania.com/ ]

Mehr songtexte: http://www.songtextemania.com/papaoutai_songtext_stromae.html
Alle Infos über Stromae: http://www.musictory.de/musik/Stromae

2013년 9월 30일 월요일

룩셈부르크 : 국가조직의 강화

우리는 있는 그대로 머물기를 희망한다 


1867년 위기가 찾아 왔을 때, 룩셈부르크 국민들은 빌럼3세에 대한 강력한 항의의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Mir wëlle bleiwe wat mir sinn“ (우리는 있는 그대로 머물기를 희망한다) 라는 슬로건은 룩셈부르크 국민들에게 인기를 얻었습니다.  독립적인 국가를 이룩하는 첫 번째 할 일은 제도적인 틀을 구성하는 것이었습니다. 1848년, 1856년 그리고 1868년 세 번의 연속적인 헌법개정으로 젊은 도시를 위한 기틀을 마련하게 됩니다. 또한 정부, 의회와 대공작 사이의 권력과 그에 따른 책임에 관한 공정한 균형을 유지하는데 중점을 두어 설립되었습니다.

룩셈부르크의 완전한 독립은 1890년 빌럼 3세의 서거 이 후에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민주주의는 남녀 모두에게 참정권이 주어진 1919년이 후에 이루어 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계 1차대전발발 전, 정치적 정당들의 출현으로 룩셈부르크의 정당정치가 시작됩니다. 사회당은 1902-1903년 사이, 자유주의 연합은 1904년에, 우파당은 1914년에 생성되었습니다. 공산당은 사회당으로부터의 분리 이 후 1921년에 설립되었습니다. 1919년 이후 모든 정치적 연립정부는 (1925-1926년과 1974-1979년을 제외하고) 쭉- 우파당에 의해 집권 되고 있습니다우파당은 1945년 이 후, 기독교 사회당 (CSV:Chreschtlech Sozial Vollekspartei)으로 이름을 바꾸고 현재까지도 다수여당으로 집권하고 있습니다. 

룩셈부르크인의 진정한 애국심의 발로는 1839년 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벨기에의 혁명을 지지하던 룩셈부르크인들은 벨기에로 부터의 분리를 아쉬워 했습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룩셈부르크인들은 그들의 나라에서 자유적인 자치권을 가지며 지낼 수 있는 장점들의 진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벨기에 혁명 20년 후인 1859 년최초의 철도청의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애국 노래는 이 후, 룩셈부르크의 진정한 국민가요로 불리우게 되었습니다. 

Kommt hier aus Frankräich, Belgie, Preisen,
Mir wellen iech ons Hémecht weisen,
Frot dir no alle Säiten hin,
Mir welle bleiwe wat mir sin.
In English, this reads:
Come here from France, Belgium, Prussia,
we want to show you our fatherland
ask in all directions,
We want to remain what we are.

하지만 Ons Hèmecht (우리의 조국)이 공식적인 국가로서 승인받으며 1864년 처음으로 공식적인 자리에서 울려 퍼지게 됩니다. 이 후 1895년 정식국가로 제정되었습니다.  Ons Hèmecht 는 미셀 렌츠의 시에 장-안토옌 진넨의 음악이 더해진 룩셈부르크의 국가입니다. 

Ons Hèmecht 듣기

19세기 중반부터 계속 된 룩셈부르크인의 애국심은 독일에 의해 흡수될 위험들이 높아지면서, 반독일 정서의 경향을 띄게 되었습니다. 1815년부터 1866년까지 룩셈부르크는 독일 연방에 가입되어 있었습니다. 독일로부터 거리를 두기 위하여 룩셈부르크는 프랑스에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룩셈부르크는 이중언어, 심지어 삼중언어를 하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어는 일상생활 뿐만 아니라 행정부와 사법부의 공식언어로 채택 되었습니다. 표면적으로 룩셈부르크는 프랑스와 가까워 지는 듯 보였지만, 사실 룩셈부르크는 독일, 프랑스 ,벨기에 어느쪽도 아닌 이 세 나라의 사이에서 중심을 잡으며 독립국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켜나가고 있었습니다.


불어공부 : Chloè magique


현재 나의 불어수준에 딱 맞는 클로이마지크! 

애기들 뉘앙스로 (약간 앵앵거리지만) 눈높이에 맞춰 불어발음을 천천히 정확히 발음해줘서 듣기 편하다. 클로이가 오리씨(Monsieur Canard)와 친구들과 함께 옷장에서 요술 옷을 갈아입고 모험을 떠나는 내용이다. 사실 불어하는 클로이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빠져들게 되는 만화>_< 그림체가 너무 예쁘다. 현실세계에서의 오리씨는 클로이가 들고다니는 헝겊인형일 뿐이지만, 모험 도중에는 말도하고 날아 다니는 오리씨가 된다.  오리씨에게 도움을 받거나하면 Merci, Monsieur Canard! 라고 말하는데, Merci 까지는 고마워 정도 느낌인데 Merci, Monsieur 하고 하면 굉장히 정중하게 들린다. (적어도 내 귀에는;; 그래서 그런가,  독어판에서는 클로이는 조이로, 오리씨는 콱콱이로 나오는데 -_- 콱콱이라는 이름은 왠지 모를 거부감이;;) 그리고 마지막 엔딩은 클로이가 엄마나 아빠에게 모험을 설명해주고 (엄마&아빠는 현실성없지만 이런 허무맹랑한 모험을 다 이해해주며) 클로이가 한 얘기를 공감해주며 끝이 난다. 한국에는 클로이의 요술옷장라는 이름으로 소개되고 있다.



아무리 찾아도 오프닝 텍스트는 찾을 수가 없어서, 듣고 따라 써본 텍스트 (미완성)

Dégisons-nous avec chloe magique

Quelle que si aujourd'hui donc chloe magique

serons-nous des sirènes de b     la mér

des ballerines des filles et super 

pillot d'avion pour voler tout la haut

ou conducteus m      , rigola!

Alors, Dégisons-nous avec chloe magique

Quelle que si aujourd'hui donc chloe magique


Tu vas la fantastique

il y a l'aventure donc chloe magique

2013년 9월 18일 수요일

룩셈부르크 : 자치권의 강화 (1839-1890)

Nicolas Liez: La ville de Luxembourg, 1870

1839년이 후로 더 이상 네덜란드와의 영토분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또한 대공은 하는 수 없이 분리된 행정부를 승인하였습니다. 네덜란드의 국왕인 빌럼2세(룩셈부르크 대공으로서의 재위기간 1840-1849)는 1841년 대공국을 방문해 "나는 룩셈부르크 대공국이 룩셈부르크 국민에 의해 통치 되기를 원한다" 라고 공표 하였습니다. 1841년 초 부터는 헌법의 보완과 수정도 허용되 었습니다. 서서히 자주적인 모습의 국가가 완성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작 170,000명의 국민을 가진 2,586 제곱킬러미터의 작은 나라가 완벽한 독립을 한다? 

처음에는 대공국은 독일 연방에 속해 있으면서, 네덜란드 왕가와도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서서히 이 들과의 관계를 끊는데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1866년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 으로 독일연방의 해체가 가시화 되었습니다. 프로이센의 확장에 직면하게 되면서, 프랑스는 영토적인 보상을 찾고 있었습니다. 룩셈부르크는 쉬운 희생자처럼 보였습니다. 나폴레옹 3세는 룩셈부르크를 네덜란드로부터 매입하고자 오백만 골드 프랑을 제시하였습니다. 빌럼3세(룩셈부르크 대공으로서의 재위기간 1849-1890)는 이 제안을 받아 들었습니다. 하지만 룩셈부르크 요새를 수비하던 프로이센은 이를 거부했습니다. 해결방안을 찾기위해 유럽강국은 또 다시 런던에 모였습니다. 

1867년 5월 11일 런던 열국회의 에서 룩셈부르크는 열강의 보장하에 영세중립국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독일연방 해체 후에도 여전히 룩셈부르크 내에 주둔하고 있던 프로이센군의 수비대도 요새에서 철수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전쟁에 이어 나폴레옹 3세의 외교적 패배를 명백히 드러낸 것으로, 이를 계기로 프로이센-프랑스 사이의 긴장이 더욱 가중되게 됩니다. 


아돌프 대공

1867년의 위기는 네덜란드 왕이 자국의 국왕과 룩셈부르크의 대공을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열강들의 야욕에 노출되어 있었다는 점에서부터 초래 되었던 것입니다.  1890년 빌럼3세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세 아들이 있었으나 모두사망), 룩셈부르크와 네덜란드의 개인적인 연합(네덜란드 국왕의 대공 겸임)은 끝나게 되었습니다. 

빌럼3세의 딸인 빌레미나가 네덜란드의 여왕으로 재위에 오르지만 (빌럼3세가 유명을 달리 할 무렵 헌법개정이 이루어지고, 이 후 딸도 후계자가 될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당시 미성년자였으므로 그녀의 어머니가 섭정했다.), 룩셈부르크 대공 지위는 나사우-바일부르그가의 아돌프에게 넘겨집니다.  그 결과 룩셈부르크는 1890년부터 나사우-바일부르그라고 불리우는 독자적인 왕가(Nassau-Weilburg)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나사우-바일부르그 왕가는 아돌프, 빌럼4세 마리-아델레이드, 샤를로트, 장 그리고 현재의 대공 앙리 공까지, 6명의 대공을 배출 하였습니다. 


참조 :  History of the Grand duchy of Luxembourg
위키피디아 & [네이버 지식백과] 룩셈부르크문제

2013년 9월 8일 일요일

룩셈부르크 : 비엔나회의 이 후, 현재의 국경을 구축하기까지 (1815-1839)


Congress of Vienna, 1815

1815년 나폴레옹 전쟁 이 후, 유럽의 지도는 다시 쓰여지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룩셈부르크 역시 영향을 받게 됩니다.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비엔나 회의에서는 네델란드 왕국을 독립시키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네덜란드 연합 왕국의 오랑주-나사우 왕가의 빌럼 6세는 나사우 백작령을 되찾는 대신 나사우 지역을 프로이센에게 넘기고 (엄마가 프로이센 국왕의 딸이었으므로 프로이센은 그의 외가였음),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와 리에주 주교령을 흡수하여 네덜란드 연합왕국을 구성하는 것으로 합의 하였습니다.  빌럼6세는 새 네덜란드 연합왕국의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오랑주-나사우의 빌럼 6세=새 연합왕국의 빌럼 1세)

지리학적으로 룩셈부르크 역시 네덜란드 왕국의 한 부분이 될 수 도 있었지만, 공국에서 대공국으로 승격되며 정치적으로 분리된 독립국의 지위를 부여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배권은 네덜란드의 국왕인 오랑주-나사우의 빌럼1세에 할당 되어 룩셈부르크는 네덜란드와 함께 오랑주-나사우 왕가의 깃발 아래 다스려지게 된 것 입니다. 빌럼1세는 이후 룩셈부르크 대공의 칭호를 부여받게 됩니다.  이로써 룩셈부르크 대공국은 네덜란드 연합왕국과 동군연합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사실 오랑주-나사우는 지금의 독일 베스트팔렌 지방의 왕조로, 1815년 나사우 지방이 프로이센에게 흡수 되면서, 룩셈부르크 대공국을 일종의 보상의 형식으로써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네덜란드 연합 왕국과 달리(오라네공 빌럼1세가 16세기 네덜란드 초대세습총독) 오랑주-나사우 왕가와는 전혀 관계 없던 룩셈부르크 대공국의 영토를 오랑주-나사우 왕가가 비엔나회의를 통해 얻게 되었던 것 입니다. 

룩셈부르크 국경 변천사 

1815년 서류상으로 룩셈부르크는 네덜란드와 다른나라로 구분되었지만, 실제로는 네덜란드의 국왕 빌럼1세 에게 다스려 진다는 것에 있어서 별 차이는 없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룩셈부르크 대공국을 마치 그의 왕국의 18번 째 지방주인 것 처럼 통치하였습니다. 네덜란드 기본법은 룩셈부르크에서도 적용되었고, 룩셈부르크의 대표자들은 네덜란드의 기관에서 일해야 했으며, 학교에서는 네덜란드어를 가르쳤습니다. 룩셈부르크 국민들이 이 것에 크게 반발하지 않는 동안, 네덜란드 정권은 경제부분과 특히 국가재정정치부분에 있어 룩셈부르크 국민들의 불만을 가중시켰습니다. 때문에 1830년 벨기에 지역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을 때,  룩셈부르크 국민들이 벨기에 독립군에 동참한 것은 결코 놀랄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수의 룩셈부르크 자원자들이 브뤼셀로 떠났고, 독립군에 가담했습니다. 1830년 10월 4일 벨기에독립군이 네덜란드 군과의 시가전에서 승리한 후, 임시정부를 수립해 벨기에 독립을 선포했습니다. 룩셈부르크의 대표자들의 일부는 벨기에 임시정부 수립을 돕게 되었습니다. 프로이센의 독립수비대에 의해 경호되고 있었던 룩셈부르크의 수도 만이 네덜란드 국왕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유럽열강들에 의해 독립 되었던 네델란드 처럼 벨기에도 유럽열강들의 이해관계 속에 독립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벨기회 의회는 이 결정을 받아들였으나 빌럼1세는 이를 거부하였고, 그 후 8년동안 대공국은 양국의 통치 아래에 놓여져 있었습니다. 룩셈부르크 도시에는 네덜란드의 빌럼공의 입김이 작용하는 동안, 도시 밖은 벨기에의 지휘권 아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결국 빌럼공은 유럽열강의 결정에 따르게 되었고, 1839년 4월 19일에 런던에서 최종조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이때 부터 룩셈부르크는 둘로 나뉘어 지게 되었습니다. 룩셈부르크 대공국은 오랑주-나사우 왕가에게 계속 승계되었고, 벨기에-룩셈부르크는 현재 벨기에의 지방주로 편입되었습니다. 룩셈부르크 대공국의 현재 국경은 1839년의 런던조약 이후로 현재까지 변화 없이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현재 룩셈부르크 국경

2013년 8월 24일 토요일

룩셈부르크 : 네덜란드 시기


14세기  당시 부르고뉴는 백년전쟁(1337-1453)을 통해 (당시 부르고뉴는 프랑스 지방에 속했지만 프랑스와 함께 싸우지 않고) 네덜란드와 영국편 에서 싸우게 됩니다.  백년전쟁 이 후 부르고뉴지방과 네덜란드는 매우 가까워졌고 부르고뉴의 필립 2세와 네덜란드의 플랑드르 지방의 마르그리트 공주가 1369년 부부가 됨으로써 플랑드르 지방은 부르고뉴 왕가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당시 왕족결혼에서 신부가 가져온 땅은 신랑쪽에게 귀속되었음) 1443년, 부르고뉴의 공작 필립 3세의 침입으로 룩셈부르크는 네덜란드령으로 통합되었습니다. 그리하야  이 시기 지금의 네덜란드, 벨기에 지방 전부가 부르고뉴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됩니다.  

필립 3세의 아들 칼이 아들을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나니 부르고뉴의 왕관은 그의 딸 마리에게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1477년 부르고뉴의 공주이며 왕위 계승자이 마리는 (앙숙인 프랑스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황제 막시밀리안 1세에게 시집을 가면서 네덜란드는 물론 부르고뉴까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막시밀리안 1 세 에게는 아들 필립과 딸 마르그리트가 있었는데 딸 마르그리트는 에스파냐 왕위 계승자인 후안과 결혼했고 아들 필리프는 에스파냐 공주 후아나와 결혼하여 네덜란드에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후안왕자가 결혼 6개월 만에 열병으로 급서하고 마르그리트가 낳은 유복자 또한 얼마 안가 죽어 트라스타마라 왕가의 장녀였던 포르투갈의 왕비 아라곤의 이사벨에게 계승권이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막시밀리안 1세



에스파냐 공주 후아나와 그녀의 아들 카를

1504년 이사벨 여왕이 죽자 왕위는 네덜란드에 살던 후아나 공주에게 넘어갔다가 그녀의 아들 카를에게 전해집니다. 그리하야 카를은 오스트리아의 황제이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1519년)이자 에스파냐 왕(카를로스 1세 :  1516년)이 됩니다. (-_-a; 태어날때부터 만렙찍고 나오다니...) 카를은 당시 서유럽을 이끌었던 왕조들 - 아라곤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의 트라스타마라 왕가, 부르고뉴 공국의 발루아-부르봉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 - 의 상속자로서 그는 중유럽과 서유럽 그리고 남유럽을 넘어 아메리카 대륙과 필리핀 제도의 카스티야 식민지까지 포함한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게 됩니다. 

당시 합스부르크가의 영토

에스파냐의 실질적인 통치는 카를이 오스트리아는 동생인 페르디난트가 맡아서 해오다가,  카를이 퇴위할 때 에스파냐와 네덜란드의 실질적인 통치가 힘들다고 보고 합스부르크 왕가를 둘로 분리하여, 에스파냐와 신대륙 식민지는 아들 펠리페 2세에게 주고 오스트리아는 페르디난트 1세가 계속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독실한 카톨릭인 펠리페 2세와 종교의 자유를 외치며 기독교를 믿으려는 네덜란드사이의 골은 더욱 더 깊어져 네덜란드 7개주 동맹의 독립군이 결성되고 처절히 싸우다 1568년 네덜란드는 에스파냐에 자주독립선언을 하며 1648년 30년 전쟁(1618-1648년에 걸쳐 30년간 유럽의 온나라가 신.구교로 갈라져 벌인 종교전쟁)의 결과로 네덜란드의 독립이 이루어 질때 까지 오랜 기간 투쟁하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초강대국 에스파냐에 굴복한 남부 열개의 주는 또 다시 에스파냐의 지배를 받게되고(1579년), 북부는 끝까지 저항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구교를 믿는 벨기에와 신교를 믿는 네덜란드로 사실상 오늘날의 국경이 정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펠리페 2세


16세기와 17세기 동안 룩셈부르크 공국은 다른 지역주들과 마찬가지로 에스파냐-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룩셈부르크는 유럽이라는 체스판 위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에스파냐-합스부르크가와 발루아 부르봉가 사이의 패권싸움에 여러번 휘말렸습니다. 룩셈부르크 도시는 "Gibraltar of the north"-북부의 천혜요새, 북부의 지브롤터 로 불리우며 꾸준히 그 명성을 유지해 왔습니다. 1659년 피레네조약 (Treaty of the Pyrenees: 30년전쟁 중에 시작한 에스파냐와 프랑스와의 전쟁을 끝맺음시킨 조약)을 통해 에스파냐는 룩셈부르크 공국의 남쪽지역(지금의 Thionville 지역)을 프랑스에 양도하였습니다. 1661년 루이 16세 가 프랑스의 왕으로 즉위하고  1684년 룩셈부르크의 요새는 루이 14세의 군대에 둘러 쌓였습니다. 그 후 1697년까지 프랑스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1697년 레이스베이크 조약을 통해 에스파냐는 점령당한 카탈루냐와 룩셈부르크 지역을 복구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1715년 에스파냐의 왕위 계승 전쟁에 의해 남쪽 네덜란드땅은 다시 오스트리아-합스부르그가에게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앞의 두세기와 달리, 18세기는 룩셈부르크에게는 평화로운 시절이었습니다.  카를 6세(재위기간 : 1715-1740), 마리아 테레지아(재위기간 : 1740-1780), 요셉 2세(재위기간 : 1780-1790)의 통치기간은 룩셈부르크 분만 아니라 다른 여러 지역에도 부흥기였습니다. 7개월간의 저항 끝에 1795년 프랑스 혁명군에게 요새를 점령 당하게 되면서, 룩셈부르크는 다시 프랑스로 편입되게 됩니다. 하지만 징병제의 도입, 의무 군 모집의 시스템은 Kleppelkrich (cudgel war)로 알려진 1798년 농민 반란을 발발하게 만들었습니다. 나폴레옹 집권시기, 온건적인 집권 방식은 대중들에게 더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참조: History of the Grand duchy of Luxembourg
위키피디아 & 먼나라 이웃나라 네덜란드편

2013년 8월 21일 수요일

룩셈부르크 : 신성로마제국 시기

룩셈부르크  대성당의 스테인 글라스 창에 새겨진 지그프리드 백작

14세기 초, 룩셈부르크가()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1308년 하인리히 7세 백작은 독일의 왕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재위기간 1308-1314) 그 후 1312년 (신성로마제국의) 로마황제 칭호를 추가적으로 획득하였습니다.  그의 아들인 존은 보헤미아 왕국(오늘날의 체코 영토부분)의 상속녀와 결혼해 보헤미아 왕의 칭호를 획득하였습니다. 


하인리히 7세 이후 룩셈부르크가에서는 

  • 카를 4세(재위기간 1346-1378)
  • 벤체슬라스(재위기간 1376-1400) 
  • 지기스문트(재위기간 1410-1437) 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직에 올랐습니다. 

1354년, 카를 4세는 룩셈부르크를 백작령에서 공작령으로 승격시켰습니다. 
1364년, 치니(chiny: 현재 룩셈부르크 경계 벨기에 지역)의 백작령의 영토를 획득하면서 룩셈부르크는 영토의 최대확장을 이룩하였습니다. 
1443년, 부르고뉴의 필립공작의 침입으로 룩셈부르크는 네델란드령으로 통합되었습니다. 
이 운명은 이 후 4세기동안의 지리적 & 정치적 통일과도 연결 됩니다. 

참조: History of the Grand duchy of Luxembourg

2013년 8월 11일 일요일

룩셈부르크 : 요새도시






요새도시 

963년 지그프리드 백작이 중세말 부터 "Bock"으로 불리우던 알제트강의 바위 곳을 획득했을 때, 그는 틀림없이 전략적 기준 역시 고려했을 것 입니다. 이 곳는 방어시설을 짓기에 최적의 장소였습니다. 백작은 그 곳에 성을 지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성 주변으로 작은 마을들이 형성되기 시작하고, 약 200년이 지난 후 하나의 도시라고 불리울 만한 여건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2세기 중반에 이르러 (오늘날 "Rue du Fossé" 까지 확장된) 견고한 성벽이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거주인구의 증가로 도시는 14세기 도시 서경으로까지 (오늘날의  Boulevard Royal) 확장되며 새로운 성벽을 구축하게 되었습니다.  도시면적은 5헥타에서 23헥타로 증가했습니다. 중세시대의 많은 도시들처럼 룩셈부르크 역시 하나의 요새도시가 되었습니다. 알제트강과 페트루세 강의 깊은 계곡들이 다방면에서(동쪽,남쪽, 북동쪽) 도시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적절한 보수에 의해 증강된 건축물의 위용과 함께 어마어마한 계곡의 높이까지 더해져 가히 천하무적이었습니다. 서쪽과 북서쪽으로 난, 성 밖으로 오갈 수 있는 길 역시 단단한 성문과 성벽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도시는 1443년 브루고뉴의 필립공작의 돌발적인 공격을 받기 이전까지 한번도 다른 이에게 점령된 적이 없었습니다. 룩셈부르크의 새로운 시대는 1354년 공작령을 부여 받으며 시작되었습니다. 이 후 네델란드령으로 통합되었다가 16-18세기 동안 발로아-부르봉왕가와 합스부르그왕가에 귀속 되었었습니다.

참조: www.lcto.lu/history

2013년 8월 6일 화요일

룩셈부르크 : 중세도시


   



중세도시 


"Lucilinburhuc" 라는 단어는 작은 요새라는 뜻도 있습니다. 이 표현은 아주 긴 시간 동안 도시를 위해 특성화 된 두가지 사실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첫번째로, 지그프리드에 의하여 얻게 된 이 바위 곶은 훌륭한 방어시설과 전략적 요충지로서 의 존재를 드러냈습니다. 룩셈부르크 도시는 1867 년에 해체 될 때까지 약 천 년 동안 요새도시로서의 명성을 지켜 왔습니다

두번째로, 이 도시는 역사상 한번도 거대도시로 존재한 적이 없었습니다. 14 세기의 초에 5,000여명의 시민으로 시작해 18세기 말까지 8,500여명의 시민들이 거주했습니다. 세계 1차 대전 이 후 46,500여명으로 급속히 증가한 이 후, 오늘날에는 82,000여명의 시민들이 살고 있습니다. 지그프리드는 바위 골짜기 위에 진정한 요새를 구축했습니다.  기사들과 군인들이 이 곳에 거주하게 되며, 공예가들과 상인들 역시 골짜기 아래 지역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위쪽 시가지와 아래쪽 시가지의 차이점이 두드러지게 되었습니다. 아랫마을을 둘러싼 돌성벽이 증축된 12세기 중후반 이후에서야 하나의 정식도시로 불리우기 시작했습니다. 

대개 도시의 기원은  종교적 장소, 수도원,  강 의 수로 또는 여러 길의 교차지점 등등 에서 유래합니다.  룩셈부르크 도시는 가파른 지역적 위치와 군사적 이용 등이 그 기원이 되었습니다. 


참조: www.lcto.lu/history

2013년 8월 2일 금요일

룩셈부르크 : 도시의 시작

Siegfried I


룩셈부르크의 이름과 기원은 한 사람으로 부터 시작됩니다.

서기 963년 카롤링거(Carolingian) 왕조의 핏줄인 아르덴의 지그프리드(Siegfried) 백작은 트리어의 St. Maximin 수도원으로 부터 알제트 강이 지나는 암벽 요새 지역을 아르덴의 Feulen 지역의 땅과 교환하고 Bockfelsen에 그의 성을 세웠습니다. 그 당시 소유권에 관한 문서를 보면, 이 작은 성을 Lucilinburhuc 이라고 지칭했습니다. 룩셈부르크의 이름은 (아마도 고대 로마에서 유래했을) 작은 성이라는 뜻의 Lucilinburhuc 이라는 단어에서 기원합니다. 그리하여 룩셈부르크 (Lëtzebuerg) 라는 이름이 역사에 처음으로 등장하기 시작 했습니다. 룩셈부르크는 처음에는 도시와 그 주변을 지칭했지만 점점 그 영역을 넓혀 종국에는 도시와 국가의 이름이 동일하게 불리우게 되었습니다.

참조: www.lcto.lu/history